[티브이데일리 황서연 기자] 89년의 역사와 전통, 권위를 자랑하는 아카데미 시상식이 '역대급' 실수를 연이어 빚는 촌극을 벌였다.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27일 오전(이하 한국시각)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LA) 할리우드 돌비 극장에서 열렸다.

일명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은 미국의 영화업자와 사회법인 영화 예술 아카데미 협회가 수여하는 미국 최대의 영화상이다. 전세계 영화계를 통틀어 가장 권위 있고 영예로운 자리로 손꼽히는 시상식이기도 하다.

특히 올해는 작품성을 인정 받은 다양한 장르와 소재를 자량하는 영화들이 등장해 시상식을 풍성하게 채웠다. 그 중에서도 신예 제작진의 재기가 담긴 뮤지컬 영화 '라라랜드'(감독 다미엔 차젤레)와 마이애미를 배경으로 한 흑인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문라이트'(감독 배리 젠킨스)가 오스카 레이스 내내 접전을 벌이며 두각을 드러냈다.

두 영화는 시상식 내내 상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선의의 경쟁을 이어갔다. '라라랜드'는 감독상, 여우주연상(엠마 스톤)을 포함해 6관왕에 올랐고, '문라이트'는 각색각본상과 남우조연상(마허샬라 알리)를 수상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서였던 작품상 부문 발표에서 두 영화 모두에게 난감한 상황이 발생했다. 시상자가 작품상의 발표를 잘못한 것이다.

이날 작품상 시상자로 나선 원로 배우이자 영화감독인 워렌 비티는 스태프에게 받은 봉투를 열고 당황했다. 수상자를 적어둔 카드에 조금 전 시상이 끝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라라랜드', 그리고 엠마 스톤의 이름이 적혀 있었기 때문. 당황한 워렌 비티는 잠시 뜸을 들이기는 했지만, 곧 그 카드를 그대로 읽었다. 그리고 '라라랜드' 팀은 모두가 무대로 올라와 돌아가며 기쁨에 가득 찬 수상 소감을 전했다.

하지만 아카데미 시상식 측이 정정에 나섰다. 사회를 보던 지미 키멜이 무대 위로 올라 "It's not a joke(이건 농담이 아니에요)"라고 말하며 '라라랜드'의 수상을 번복한 것. '라라랜드' 측은 정중하게 '문라이트'를 향한 축하 인사를 전했고, '문라이트' 팀이 뒤늦게 올라와 수상소감을 말했다. 하지만 이미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이라는 영광, 그것도 89년 역사상 두 번째로 흑인 감독이 작품상을 수상하는 기념비적인 순간의 기쁨이 '역대급 해프닝'으로 인해 희석된 뒤였다.

여기에 사회를 맡았던 지미 키멜의 적절치 못한 대처 역시 도마에 올랐다. 호스트(Host), 즉 쇼를 이끄는 주인으로서 문제가 생겼을 경우 이를 수습하고 발빠르게 대응에 나서야 했을 그가 시청자들을 향해 "농담이 아니에요"라는 말을 던지고, '라라랜드'와 '문라이트' 양측이 당황하고 있을 때 시상식 측을 대신해 사과를 하기는 커녕 "그냥 두 영화 모두에게 상을 주면 안 되나요?"라는 철 없는 소리를 하며 상황을 더욱 악화 시켰다는 것이다.

결국 시상식 이후 지난 82년 간 아카데미 시상식의 개표 과정을 담당해 온 다국적 회계 컨설팅 기업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는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다. 해당 사과문을 통해 PwC는 "'라라랜드'와 '문라이트', 시상자 워렌 비티, 페이 더너웨이, 그리고 시청자들에게 작품상 발표와 관련해 일어난 실수에 대해 사과드린다"며 "발표자가 다른 부문의 잘못된 봉투를 건네 받았고, 발견하자마자 즉시 정정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조사 중이고 이런 일이 발생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전했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실수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사람을 고인으로 만드는 황당한 실수도 있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매년 최근 타계한 영화인들을 추모하는 '고인을 추모하며'(In Memoriam) 코너를 준비하는데, 이 코너의 자료화면 영상에서 생존 인물의 사진이 들어가는 치명적인 실수가 벌어진 것.

아카데미 시상식 측은 지난해 10월 타계한 호주의 의상 디자이너 재닛 패터슨을 추모하며 생존인물인 호주의 영화 프로듀서 얀 채프먼의 사진을 삽입했다. 해당 영상은 전세계에 실시간으로 송출됐다.

방송으로 이를 접한 얀 채프먼은 한 언론사에 이메일을 보내 "내 훌륭한 친구이자 오랜 협력자인 재닛 패터슨을 추모하는 코너에 내 사진이 올라와 너무 당황했다"며 불편한 심경을 전했다. 또한 "재닛은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네 차례나 후보에 오른 사람이며 나는 생존해있고 지금도 제작자로서 활동 중이다. 어떻게 이런 실수가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9월 에이즈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한 할리우드 배우 알렉시스 아퀘트가 이 코너에서 누락됐다는 사실 또한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알렉시스 아퀘트는 지난 2006년 공개적으로 성전환자임을 밝혔고, 2007년에는 성전환 수술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에 출연한 이력이 있다. 이에 유족 측은 아카데미 시상식이 성소수자를 배제했다는 주장을 내놓으며 불만을 토로했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는 지난해 인종차별 논란을 의식한 듯 사뭇 달라진 분위기가 흘렀다. 영화인들은 하나로 뭉쳐 반 이민 행정명령을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하고 풍자했고, 지난해에 비해 흑인 영화를 배척하는 분위기 역시 줄어들었다. 이는 분명 시상식의 권위를 다시 세우는 성숙한 행동들이었다.

하지만 주최 측의 '역대급' 실수가 유서 깊은 아카데미 시상식을 동네 잔치로 전락케 했다. '화이트 오스카'라는 오명을 벗은 대신 '실수 투성이 오스카'라는 새로운 오명을 쓴 아카데미 시상식의 실수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티브이데일리 황서연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해당 자료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