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윤송희 기자] 30년간 방송사와 단체협약을 체결해 온 방송 연기자들의 유일한 단체교섭 주체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이하 한연노). 한연노 측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절대 갑의 위치인 방송사의 행태를 지적했다. 더불어 한연노 소속 방송 연기자들은 방송사의 적이 아닌 상생 파트너임을 확실히 했다.

19일 오전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홍우빌딩에서 한연노 측이 방송연기자도 관계법상 노동자에 해당한다는 대법원 판결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기자회견에는 한연노 김영진 사무총장, 김준모 위원장, 이규준 탤런트지부장, 김태득 무술지부장, 배우 이한위 손병호, 성우 이연희, 코미디언 엄용수가 자리했다.

앞서 지난 2012년 한연노 측은 한국방송공사(이하 KBS)에 출연료 협상을 요구했으나 KBS가 거부했다. 또한 협상 이전에 KBS는 약 17억원에 달하는 출연료를 연기자들에게 미지급한 상태였다. 이에 한연노는 미지급 출연료 지급 촉구 투쟁을 전개했지만, KBS는 출연료 지급을 계속해서 회피했다.

게다가 2012년은 2010년 신설된 노조법이 시행됨에 따라, 하나의 사업장에 복수의 노조가 존재할 경우 교섭 창구를 일원화해 사용자와 교섭해야 했다. 한연노는 노동위원회에 협상에 응하지 않는 KBS와의 조정을 신청했다. 하지만 노동위원회 측은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정할 수 없단 입장을 내놓았다.

KBS 역시 노동위원회와 같은 이유를 들며 교섭을 거부했다. 그러나 KBS의 대표 교섭 단체는 이미 'KBS 노동조합'으로 결정된 상태였다. 'KBS 노동조합'은 PD, FD와 같은 방송사 직원, 즉 프로그램 제작진으로 구성된 노동조합이었다. 한연노 측은 방송 연기자들의 관리자 위치에 있는 이들만 소속된 'KBS 노동조합'이 노조의 이익을 대변하게 하는 것은 단체교섭권 침해라고 봤다. 이에 한연노는 노동위원회에 교섭단위 분리를 신청했다.

2013년 지방노동위원회는 교섭단위 분리 필요성을 인정했으나, KBS가 판정에 불복해 재심을 신청했다. KBS는 교섭단위 분리 결정을 신청할 수 있는 당사자적격을 문제 삼았다. 재심에서 중앙노동위원회는 KBS의 주장을 받아들여 KBS와 방송연기자의 사용종속관계를 부정했다. 중앙노동위원회는 지방노동위원회의 결정을 취소, 원고의 초심 신청을 각하했다.

한연노 측은 중앙노동위원회의 판정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행정법원 재판부는 "한연노는 이익집단이지 노조법상 노동조합이 아니다"라며 방송연기자의 노동자성과 노조의 정체성을 부정했다. 이에 2014년 한연노는 재판부에 현장검증을 요구했다.

KBS 별관 촬영장에서 판사 3인, 법원 직원, 사용자 측 담당자와 변호사, 노조 담당자와 변호사 등 20명 정도가 현장 검증에 참여했다. 이들은 촬영장, 대기실, 소품실 등 촬영 전 과정을 조사했다. 이들은 방송연기자들이 대본 연습 시간에 맞춰 연습실에 오며 연습에는 연출 감독도 참석하는 점, 촬영 스튜디오에서는 연기자들이 FD나 PD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점, 의상 및 소품의 제공 여부를 확인했다.

그 결과 2015년 항소심 재판부는 방송연기자의 사업자성을 부정하며 그간의 노사 관행, 근로자성 판단 요소 등을 토대로 방송연기자가 노조법상 근로자임을 명확히 했다. 또한 한연노는 노동조합이라는 점도 덧붙였다.

2018년 대법원은 방송연기자는 노조법상 근로자이며, 한연노 측은 교섭단위 분리 결정을 신청할 자격이 있다고 최종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재판부는 KBS가 방송연기자와 체결하는 계약 내용을 일방적으로 결정한다는 점, 방송연기자는 KBS를 비롯한 방송 사업자의 방송 사업을 통해서만 방송연기 시장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 KBS가 방송연기자들의 업무 수행 과정에서 구체적인 지휘 감독을 하고 있는 점을 지적했다.

재판부는 방송연기자들의 연기 또한 노무 제공이라고 봤고, 이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방송 사업자와 대등한 위치에서 노무 제공 조건을 교섭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김준모 위원장은 "오죽하면 저희끼리는 '떼인 돈 받아드립니다'라는 자조 섞인 농담을 할 정도다"라며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방송 연기자들을 사용하는 방송사들의 행태를 지적했다. 계약서 작성이 이뤄지지 않는 탓에, 방송 연기자들은 출연료 미지급과 같은 문제가 생겨도 책임 소지를 물을 곳이 없다. 또한 방송사 측은 외주 제작사를 탓하고, 정부 기관마저 비협조적인 탓에 방송 연기자들 구제는 더욱 난관에 부딪혔다.

그는 "항상 방송에는 '억대 출연료' '회당 억대 계약'과 같은 타이틀이 등장한다. 방송 연예 산업은 몇몇 스타들 덕에 화려해 보이지만, '억대' 타이틀을 갖고 있을 정도의 연기자는 1%도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김준모 위원장은 "보통 1%의 허울만 보고, 99%의 연기자 처우는 보지 않는다. 계약에 있어 방송사의 위치는 갑 중의 갑이다. 이 때문에 합리적인 계약을 할 수 있고, 계약 위반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고, 출연료를 떼이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시청자들에게도 1%의 톱스타가 아닌 다수의 연기자들을 봐주길 간곡히 부탁했다.

다수의 연기자는 출연료를 깎아달라는 캐스팅 디렉터의 요구에 시달리며, '제때 돈을 받을 수는 있을까'하는 걱정에 시달린다는 것이 한연노 측의 증언이다. 특히 한연노가 노동조합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때는 방송연기자들이 부당한 행위를 당해도 해결이 더욱 어려웠다. 방송 연기자들은 자신의 사용자로 이뤄진 노동조합과 만나 합의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선택받아야 하는 입장인 방송 연기자들은 피해를 당해도 그저 침묵해야 했다.

하지만 2018년 10월 12일 한연노 측은 방송연기자의 노조법상 노동자성을 인정한 최초의 판례를 남겼다. 이에 한연노 측은 "근로자성이 강화되는 만큼 여타 기관에 롤모델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방송연기자를 비롯해 문화산업에 종사하는 예술인과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고 자부했다.

7년에 걸쳐 진행된 '교섭단위 분리 재심 결정 취소 소송'은 한연노의 승소로 마침표를 찍었다. 한연노는 "이제 방송사가 움직일 차례"라고 봤다. 이들은 KBS를 비롯한 여타 방송사들의 진심 어린 사과와 단체교섭 즉각 재개를 요구했다. 또한 7년 전 기준으로 책정된 출연료 등급표 조정을 강하게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한연노는 방송사가 방송 연기자의 노동을 방송 사업 핵심 요소 중 하나임을 인정하길 바랐다.

화려해 보이는 방송 산업의 이면에는 출연료만으로 생계를 꾸릴 수 없어 투 잡, 쓰리 잡을 소화하는 방송 연기자들이 있다. 공영방송 KBS가 한연노의 요구를 더 이상 무시하지 않고, 파트너로서 상생 관계를 꾸려 나갈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티브이데일리 윤송희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제공=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