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김수영 기자] 배우가 아닌 감독으로 인사를 건네는 추상미는 당차고 자신감이 넘쳤다. 작품에 대해 말하는 목소리에는 거침이 없었고, 생각을 밝히는 눈빛에서는 강인함이 새어 나왔다. 분명한 소신을 바탕으로 감독으로서 의미 있는 발걸음을 내딛고자 하는 추상미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감독 추상미·제작 보아스필름)은 1951년 폴란드로 보내진 1500명의 한국전쟁 고아와 폴란드 선생님들의 비밀 실화, 그 위대한 사랑을 찾아 남과 북 두 여자가 떠나는 치유와 회복의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추상미가 극영화를 준비하던 중에 캐스팅한 탈북 소녀 이송과 함께 폴란드 프와코비체로 향해 전쟁고아들을 돌봤던 교사들과 만나 직접 당시의 이야기를 듣는다.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배우로 활동한 추상미는 지난 2010년 '분장실'과 2013년 '영향 아래의 여자' 두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하며 감독으로 인생의 또 다른 변환점을 맞이했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추 감독의 첫 장편 영화다. 묵직한 소재에 다큐멘터리 장르까지 그의 선택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그 시작이 지극히 개인적인 아픔에서 비롯됐다고 밝힌 추상미 감독은 "산후우울증을 강도 높게 겪었다. 내 아이에 대한 집착과 애착이 강해서 악몽을 꾸기도 했다. 아마 내가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할 것 같은 부담이 심해서 불안했던 것 같다"고 말문을 열었다.

추 감독은 "한창 힘들 시기에 북한의 꽃제비 영상을 보고 그냥 눈물이 났다. 꽃제비 아이에게 우리 아이가 투영되면서 감정 이입이 됐고, 호기심이 생겼다"면서 "국경 지역이라고 해도 차로 두세 시간이면 가는데 그곳에서 많은 아이들이 굶어 죽는 거다. 분단의 현실이 와닿았다. 다른 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인근 나라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어떻게든 살렸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린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분단 현실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사실에 기분이 이상했다"고 털어놨다.

우연히 접한 꽃제비 영상에 격렬한 감정의 파동을 느낀 추 감독은 운명처럼 북한 전쟁고아들을 소재로 한 소설 '김귀덕'을 접하게 됐단다. 감독은 "후배가 일하는 출판사에 갔다가 '김귀덕' 이야기를 듣고 관련 자료들을 받았다"면서 "분단 초에 전쟁고아들이 생겨났다면, 꽃제비는 분단의 현재성을 의미한다. 현재 시점에서 분단이 아니었으면 겪지 않았을 일들을 생각했다. 나한테는 다른 소재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산후우울증이 심해서 이걸 이겨내기 위해서라도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밝혔다.

그렇게 극영화 '그루터기들'을 준비를 하던 중, 감독은 돌연 다큐멘터리인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구상해냈다. 이유는 단 하나, 책임감이었다. 추 감독은 "극영화를 준비하면서 디테일을 위해 직접 폴란드에 가서 장소를 보고, 생존 교사들의 인터뷰도 진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많은 폴란드 교사들이 고령이었다. 이분들이 돌아가시면 '누가 증언을 해주나' 하는 생각이 들어 육성과 기록을 남기기로 결심했다"면서 "우연히 나한테 들어오게 된 소재였는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책임감과 사명감이 들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다큐멘터리로 방향을 선회하자 확실히 어려움과 맞닥뜨렸다는 추 감독은 "그래서 2년이 걸렸다"며 웃었다. 감독은 "구도를 잡기도 힘들었고, 전개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면서 "마음의 문이 닫혀 있던 송이가 점차 변해가는 과정과 다큐멘터리적인 부분을 균형 있게 짜는 게 어려웠다. 이야기들이 서로 동떨어지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두 가지의 조화를 이뤄내는 게 어려웠다"고 제작 당시의 고충을 고백했다. 이어 그는 "그래서 영화적인 방식을 택했다. 시네 다큐 형식으로 가고 싶었다. 실화를 관객분들이 보기 편한 방법으로 풀어나가려 했다"고 설명했다.

쉽지 않은 도전임에도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통해 추 감독이 전하고자 했던 바는 분명했다. 이데올로기가 아닌 상처의 연대, 그 안에서 오는 사랑이었다. "이 영화가 단순히 통일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되고 싶지 않았다"는 추 감독은 "분단의 상처를 새롭게 조명하고, 그 안에서 비롯되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다루고 싶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폴란드 선생님들은 자신들이 지닌 역사적, 개인적 상처의 경험을 다른 아이들을 품는데 선하게 사용했다. 어떤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개인의 상처가 사회의 문제나 아픔들에 공감할 수 있게 확장되는 거라 생각했다"면서 "양육원 원장님이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전해달라'는 말을 한다. 촬영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계속 귓전에 맴돌던 말이었다"고 말했다.

실로 상처의 연대가 지닌 힘은 막강했다. 과거 한국전쟁 고아들을 돌봤던 폴란드의 선생님들의 사랑은 현재 이송의 상처 또한 치유했다. 추 감독은 "송이는 과거의 아픔을 잊어버리고 싶어 하는 상태였다. 북한에 대해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근데 생각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남한에서 완벽하게 적응해서 살고자 하는 의지 같았다"며 이송과의 만남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상처는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폴란드에 가서 경험을 물어봐도 얘기해주지 않더라. 그건 본인의 권리이니까 캐내서 물을 수는 없었다"고 털어놨다.

추 감독은 "그런 송이가 폴란드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마음의 빗장이 풀리기 시작하더라. 폴란드 선생님들은 65년 동안 아이들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관심이 높다. 한반도 상황이 뉴스에 나오면 그걸 다 귀 기울이며 지켜보고 계신다"면서 "그 분들이 송이의 손을 잡거나 꼭 안아주면서 울었다. 그럴 때마다 송이도 울었다"고 밝혔다. 이어 "선생님들이 북한 아이들이 얼마나 착하고 부지런했는지를 얘기해주니까 본인도 남한에서 힘들었던 점들을 말하더라"고 덧붙였다.

세대와 국경의 장벽을 뛰어넘는 뜨거운 상처의 연대를 다룬 '폴란드로 간 아이들'. 영화는 지난 13일 폐막한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와이드앵글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부문에 초청됐고, 작품에 담긴 진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지며 큰 호평을 이끌어냈다. 이에 대해 추 감독은 "그게 되게 작은 부문이다.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가 이렇게 작은 부문에 이토록 큰 언론의 관심을 받은 건 처음이라고 하더라. 정말 감사하다"고 기쁜 마음을 드러냈다. 그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자신을 성장시킨 작품으로 정의했다. 추 감독은 "내가 성장한 걸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보시는 분들도 함께 성장했으면 좋겠고, 또 상처도 위로받으셨으면 한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추 감독이 작품을 대하는 태도와 제작에 임하는 마음가짐은 그의 뚝심을 닮아 단단했다. 감독은 "사회적인 문제, 즉 역사의 선상에 있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그간 역사에 대한 성찰이 많이 없었다. 그만큼 새로운 관점들이 없었다는 거다"고 생각을 밝혔다. 그는 "근현대사의 아픈 상처들을 치유할 수 있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 그 당시로 돌아가야 할 이유들을 찾은 것 같다"며 밝게 웃었다.

감독 추상미의 삶은 활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직까지는 다시 배우 활동을 할 생각이 없어요. 제가 배우를 할 때만 해도 주로 감독이 남성이었고, 남자의 프레임에서 보는 여성 캐릭터가 많았어요. 피상적인 느낌에서 벗어나 이제는 살아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너무 리얼해서 저를 캐스팅하고 싶기도 해요(웃음)." 분명한 목표와 자신감, 또 다른 길목에서 스타트를 끊은 그의 레이스에 박수를 보내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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