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김지현 기자]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이지만, 박찬욱 감독(56)을 만나면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조우하는 기분이다. 미로처럼 복잡해 보이는 그의 내면에 침잠한 것들이 무엇인지 궁금해지고, 그 세계에서 발현돼 나오는 단어들은 그가 아직 보여주지 않은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긴다. 박 감독의 영화가 품은 아우라는 실제 그의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직 박찬욱을 모른다. 아는 것 보다 궁금한 것이 더 많은, 보여준 것 보다 보여주지 않은 게 더 많은 감독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박찬욱을 영화 밖에 모르는 영화광이라고 여긴다. 때문에 OTT(Over The Top,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플랫폼에 대한 도전, 특히 드라마를 선택한 것은 다소 의외의 행보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 미술적 미장센으로 가득했던 ‘아가씨’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왜 그는 드라마에 끌린 것일까. 예상외로 간단한 이유다. TV라는 매체, 드라마라는 장르에 대한 순수한 도전 의식과 호기심이다.

“TV로 눈이 돌려지더군요. 한국에서 판권을 산 것(채널A)은 저도 예상치 못한 일이긴 했지만요. 왜 넷플릭스가 아니라 왓챠냐고 물으시는 분들이 많은데 감독판을 제작하고, 그걸 구입해서 서비스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에요. 감독 입장에선 고마운 일이죠.”

그의 첫 드라마 연출작인 ‘리틀 드러머 걸’은 1979년 이스라엘 정보국의 비밀작전에 연루돼 스파이가 된 여배우 찰리(플로렌스 퓨)와 그를 둘러싼 비밀 요원들의 이야기를 그린 첩보 스릴러다. 영국 소설가 존 르 카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영국 BBC와 미국 AMC가 공동 제작했다.

수 천권의 책으로 가득한 그의 서재에서 존 르 카레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고등학교 시절 ‘추운 나라에서 돌아 온 스파이’를 읽으며 흥분한 일은 여전히 떨림으로 기억되고 있다. 박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첩보물 영화 또한 존 르 카레 원작의 ‘팅거, 테일러, 솔저, 스파이’다. 존 르 카레는 첩보, 스릴러와 무관한 자신의 작품에도 영향을 준 작가다. 선과 악을 구분 짓지 않는, 회색지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공감을 보여준 소설가라 애정이 간다. ‘리틀 드러머 걸’을 드라마화 한다는 건 어린 시절 박 감독이 숭배했던 작가의 세계를 구현하는 일이기도 했다.

“‘아가씨’도 그랬지만 원작이 있는 작품을 연출할 때 그 소설을 읽었을 때 무엇에 반했는지, 그 느낌을 놓치지 않으려고 해요. 거듭 되풀이 하며 읽지는 않고 딱 한 번만 읽어요. ‘리틀 드러머 걸’도 그랬죠. 전 첩보 스릴러는 어려운 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알쏭달쏭, 어리둥절한 느낌이랄까. 안개가 자욱한데 뒤에서 그 안개가 걷히고 그림이 드러날 때 느껴지는 즐거움이 이 장르의 매력 아닐까요. 캐릭터도 매력적이에요. 이 드라마는 마티(마이클 섀넌)의 이야기이기도 해요. 마티는 하나의 우주를 창조하고 조정하는 설계자죠. 그런 점에서 작가, 감독과 닮은 존재에요.

캐릭터를 설명하는 박 감독에게서 그가 드라마에 도전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올드보이’ 10주년 때의 일이다. 다시 봤을 때 이 이야기는 최민식이 아닌 유지태의 이야가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박 감독은 조연들의 분량을 편집하는 게 아프다. 이들의 풍부한 사연을 그리고 싶은데 영화는 시간상 수위에 한계가 있기 마련. 드라마에 도전한 이유는 이 캐릭터들을 회 마다 다르게, 깊이 있게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만큼 많은 세계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 이게 드라마의 매력이 아닌가. ‘리틀 드러머 걸’ 역시 보는 사람 마다 주인공이 다를 수 있게 그리고 싶었다. 누군가에게는 마티가 누군가에게는 찰리, 베커가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예상 외의 부분이 또 있다. ‘리틀 드러머 걸’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로맨스다. 여배우 찰리를 첩보의 세계로 인도한 베커(알렉산더 스카스가드)와의 절제된 로맨스가 미묘하다. 찰리가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제 주머니 속에 넣는 베커의 모습엔 절제된 애절함이 느껴진다. 두 사람의 눈빛과 손스침에도 그런 절심함이 보인다. 이토록 섬세하게 로맨스에 집중했다니, 박 감독이 보여주는 의외의 모습이 아닌가.

“가장 뿌듯해 하는 장면이에요. 근데 제가 로맨스를 잘 못그린다는 건 편견이에요. 그런 애틋한 순간들을 작품 마다 그렸다고 생각하는데 관객들은 센 모습만 기억하더군요. 폭력적인 장면이 좀 있어서 그럴까요? 물론 관객들한테 뭐라고 한 일은 아니고 제 잘못이죠. ‘리틀 드러머 걸’은 센 폭력신이 없어서 그런 애정신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나봐요. 사실 이 드라마에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스릴과 로맨스를 동등하게 그리는 것'이었죠.

돌이켜보면 박 감독의 말이 맞다. 그는 정교하다. ‘박쥐’부터 ‘아가씨’, ‘리틀 드러머 걸’까지 그가 그리는 여주인공들은 기존 한국 영화 감독들이 그려낸 그것들과 치원이 다를 정도로 섬세하다. 왜 그는 지속적으로 여성들의 서사와 캐릭터에 집중하는 것일까. 그 디테일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감독이기 때문에 복합적인 캐릭터에 끌려요. 남성 위주의 이야기는 너무 흔해서 뭘 얘기해도 비슷해 보이기는 경향이 있죠. 물론 저도 남자들의 이야기도 그려왔지만요. 캐릭터를 만들 때 흥미성, 복합성에 관심을 갖는데, 그렇게 겹겹이 쌓인 캐릭터에 여성들이 유리해요. 아무래도 여성들의 인생살이가 힘든 부분이 있잖아요. 차별과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그런거요. 때문에 여성들의 내면엔 더 쌓여있고, 깔려있는 게 있어요. 그런 점에 끌리죠.

박 감독만이 가질 수 있는 날카로운 통찰력에 그가 최근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젠더 갈등'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어느 쪽이든 극단적인 의견은 좋지 않죠. 사실 이 부분은 말하기 조심스러운 문제에요. 어떤 사람들은 작은 수위도 높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멀었다고 하죠. 남성들에게 반대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그게 어렵다면 상상력을 키워보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상상력을 키워서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 말이죠”

차기작도 여성의 이야기일까. 아직 정해진 것은 없다. “긴 이야기가 필요하다면 또 드라마를 하는 것도 괜찮아요. 하지만 차기작은 우선 영화에요. 제 작품이 영어든 한국어든 차기작은 극장용 외의 작품은 없어요. 만약 드라마를 또 한다면 사전제작으로 하고 싶습니다”

영역에 한계를 두지 않는 박찬욱 감독의 세계에는 아직 열리지 않은 보석함들이 남아 있다. ‘리틀 드러머 걸’라는 보석함을 열어 보면 박 감독의 새로운 얼굴이 보인다. "제가 드라마 얘기를 하는 게 어색한가요? 오히려 그런 TV의 특성에 끌렸습니다. 저만의 방식으로 그렸지만요. 이 드라마를 시청자가 PC 모니터로 보든, TV로 보든, 심지어 스마트폰을 세로로 보더라도 가치있는 장면과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어요"

[티브이데일리 김지현 기자 news@tvdaily.co.kr /사진=왓챠플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