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어느날 갑자기 태어나는 스타도, 인고의 시간을 거쳐 드러난 스타도, 겪어내야 할 일정 시간이 주어진다는 점에선 동일하다. 시기의 차이에 따라 전자의 것은 슬럼프, 후자의 것은 무명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무엇이 더 고되고 힘들지는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 눈에 띄는 훤칠한 외모 상으론 전자에 속할 듯 싶은 ‘유태오’도 실은 15년의 무명 배우 시절을 보내고서야 빛을 본 후자의 예다.

유태오가 한국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건, 그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레토’가 제71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하면서부터다. 영화를 향한 극찬은 물론이고 남우주연상 후보에까지 오르며 레드카펫을 밟았으니, 예기치 못한 순간 생소한 한국 배우의 등장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그의 존재를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레토’는 러시아에서 감각 있는 연출로 유명한 감독 ‘카릴 세릴브렌니코프’의 작품이다. 그러니까 한국도 아닌 러시아 영화이며, 그가 맡은 배역은 실존했던 인물로 옛 소련의 전설적 가수이자 한국계 러시아 스타인 ‘빅토르 최’다. 무려 러시아어로 연기를 해야 할뿐 아니라 러시아인들에게 있어 젊음과 자유를 상징하는, 그래서 그들의 역사에서 중요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음악계의 영웅을 구현해내야 했다.

이 어려운 작업에 선택된 것도 놀라운데 반드시 만날 수밖에 없었을 배역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유태오는 빅토르 최를 영혼까지 온전히 담아내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유태오는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로, 고려인 2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빅토르 최와 독일에서 나고 자란 이민 2세로서의 자신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이방인으로서의 멜랑꼴리한 감수성 등을 꼽는다.

하지만 맡은 배역과 유사한 감수성을 가졌다고 해서 연기를 잘 하리란 보장은 없다. 유태오가 ‘무명’이라고 일컫는 그간의 쌓아올린 시간에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 얹어진 까닭에, 전설적인 록가수의 이면에 있던 색깔까지 제대로 끄집어낼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배우와 작품의 배역이 제 때,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온전하게 맞닥뜨리면서 거대한 시너지를 발휘한 경우다.

‘레토’의 빅토르 최는 작품이 칸 영화제에 초청되며 세계에 이름을 알렸고 유태오 또한 오랜 무명을 벗어나 다수의 대중이 이름을 알고 얼굴을 아는, 스타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으니 말 다한 셈 아닌가. 우리로서는 또 하나의 숨은 보석과 같은 한국 배우를 알게 되어 더없이 흡족하고 설렌다. 연기에 있어 자신만의 관점은 물론이고 열정도 갖춘 배우를 안다는 것은 그가 앞으로 만들어낼 다채로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품게 하는 일이니까.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의뭉스러운 속내를 가진 원어민교사 ‘메켄지’를 맡아 얄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악당의 면모를 보여주었고, ‘머니게임’에서는 ‘유진한’을 통해 사연 있고 상처 있는 또 다른 악역의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가 보낸 무명의 시간들이 그냥 흘러가지 않았음을, 그 사이 빈틈없이 탄탄하게 쌓인 연기력으로 입증하고 있으니, 우리의 시선으로는 말그대로 ‘혜성처럼’ 나타난 배우인데 안정감까지 가지고 있어 더없이 매력적이다. 이제 곧 개봉될 영화 ‘새해전야’의 패럴림픽 국가대표 ‘래환’의 역할을 포함하여 앞으로 그를 통해 만나게 될 무궁무진할 얼굴들이 기다려지고 기대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니스트 news@tvdaily.co.kr, 사진 = DB, 영화 '레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