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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이런 사랑도 있습니다”. 멜로로 돌아온 거장의 변은 대개 이러할 것이다. 다면체로서의 인간을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한국을 넘어 북미, 유럽까지 위세를 떨친 K-거장 박찬욱 감독은 현재 모호필름 대표다. 영화의 장(場)을 총괄하는 감독이자 프로듀서이며 때로 각본을 직접 써 내려가는 시나리오 작가, 거시적으로 시네마 산업 속성을 궤뚫고 있는 또 한 명의 예술계 수장인 셈이다. 그런 그가 각본, 제작, 감독을 모두 내세워 오랜만에 내놓은 신작은 예상대로 무척 정교하다.

[티브이데일리 이기은 기자] 관찰을 좋아하는 중년 남자의 직업은 공교롭게도 형사다. 비루하고 끔찍한 죽음의 잔재와 그에 연루된 핍진한 진실을 오래도록 쫓다 보니, 그 속마음도 풍랑의 세월을 따라 형언할 수 없이 복잡해졌다. 이쯤 되면 내 속이 내 속인지, 자신조차 스스로의 특질을 파악할 수 없는 지경이다.

인간의 내면은 누구도 들여다 볼 수 없다. 선한 인상의 사람이 우발적인 범죄를 저지르기도, 대체적으로 교활하다는 평가를 들어온 이가 종국엔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기묘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예술계를 홀리는 거장들은 세계를 양분하거나 특정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박 감독의 신작 ‘헤어질 결심’(감독 박찬욱·제작 모호필름)도 마찬가지다.

제 75회 칸 국제영화제는 경쟁작으로 초청된 이 영화에 탄복했고 그에게 감독상을 수여했다. 외신은 두 어 달 째 거장의 귀환을 다각도로 반색하고 분석하며 “정점에 올랐다”고 평한다. 미국 영화 비평 사이트 로튼 토마토 역시 신선도 100%를 기록하며 박 감독이 비단 오랜 기억 속의 거장이 아닌, 미디어 속 Z세대와 발걸음을 함께 하는 현역임을 알게 한다.



2022년 세계 관객, 평단, 종사자들에게 대한민국 영화는 어떤 존재일까. 소위 ‘힙(Hip)'하다는 인상에 가까울 것이다. 예술에도 시대적인 기류와 트렌드는 존재한다. 특히 백인들의 오스카, 유수 유럽 영화제는 현재로서 대중적‧예술적으로나 뜨거운 평가를 받고 높은 매출 실적을 올리는 K-무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유명 평론가, 굴지 외신으로서도 박찬욱의 신작은 으레 관심을 갖고 분석해야 할 매혹적인 '떡밥'인 셈이다. 물론 이 같은 충무로 영화를 향한 세계적 관심이 수상에 영향을 줬을 테지만, 이와 별개로 ‘헤어질 결심’은 시네마사의 보편적인 예술성과 완성도를 담보하고 있다.

박찬욱의 전매특허 세공
호화롭고 육(肉)적인 미장센

절벽 아래 변사체가 세밀하게 클로즈업 된다. 파리가 사체의 눈알을 먹어 치우기 시작하는 박 감독의 전매특허 미장센의 극대화 속에서, 이는 아무래도 악의를 내포한 살인 사건일 가능성이 크다. 담당 형사 해준(박해일)은 사체의 중국인 아내 손서래(탕웨이)와 마주 앉아 꼼꼼한 심문을 시작한다. 그러나 삶 전반에 모호함을 느끼는 섬세한 남자 해준은 이 아름다운 이방인에게 말할 수 없는 연민을 느꼈으리라.

가령 심문실에서 진행된 두 사람의 저녁 식사 플롯이 몹시 의미심장하다. 불그스름한 빛깔의 활어회가 올라간 스시(초밥)가 오늘의 메뉴다. 이 긴장감 넘치는 남녀의 공식 대면 뒤에는 90%의 서슬 퍼런 의심이 자리한다. 더불어 5%의 호기심, 4%의 피로, 1% 정도의 육(肉)적인 끌림도 있다.

한국말을 잘 못 하는 여주인공의 설정은 영화 안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현대판 계급과 자본주의가 팽창할 대로 팽창한 한국 사회에서 아시아계 이방인 여성의 삶은 그 자체로 전쟁이다. 약하고 젊은 여성 계층을 노리는 검은 손 사이에서 서래는 사기, 절도, 살인 등 범죄에 시나브로 가까워져 있다.

해준은 직업 상 이 여자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 간파할 수 있다. 때문에 일차적으로 여주인공이 중국인이라는 설정은, 서래가 밑바닥 인생의 A to Z를 궤뚫고 있는 형사 해준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가림막이다. 두 번째로 이는, 언어가 잘 통하지 않는 남녀 간의 긴박한 멜로를 설득하는 장치다. 요컨대 사랑은 언어나 처지, 국경을 넘는 무형의 감정 사안이라는 것이다. 남녀는 곧 살아 움직일 것 같은 고기의 살점을 함께 먹거나 서로의 알 수 없는 눈빛을 지그시 바라보며 그렇게 서서히 감정의 온도를 올려간다.



두 가지 사건의 판이한 전개
전vs후반을 정돈한 경제성

첫 번째 살인을 쫓는 해준의 경위 조사, 알리바이 증명 과정은 피지컬 면에서 무척 번거롭다. 그 말은 곧 추리 장르물의 정밀함으로 환치된다. 이 여자가 과연 남편을 죽이긴 한 것인가. 이 여자는 그 시각 대체 어디에 있었나. 죽였다면 왜 그 남자를 제거해야만 했나. 다양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카메라는 정통 추리극으로서의 탄탄한 구조와 뉘앙스를 정교하게 구현해냈다. 이 첫 사건을 함께 겪은 남녀의 마음과 관계도 물론 우물처럼 웅숭깊어졌다.

때문에 두 번째 사건의 트릭은 그만큼 최소화돼 있다. 두 사람은 이미 여러 면에서 내통했다. 그렇다면 간결하고 경제적인 플롯의 해결 뒤엔 인물들의 명징한 감정만이 남게 된다. 해준과 서래의 이토록 확실한 마지막 감정은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이다. 하지만 그들의 삶과 미래는 알다시피 장밋빛일 리 만무하며, 복잡하고 험난한 미제들만을 수반한다.

그래서 서래가 결심하는 최후의 어떤 선택은 도저히 꿈 꿀 수 없는 둘 사이의 미래를 차라리 원천 봉쇄하는 일이다. 관객은 감동적이다 못해 장엄한 엔딩을 외면할 수 없이 목격하게 되는데, 이 2시간 남짓의 과정이야말로 ‘영화를 보는 일이 곧 삶의 체험’이라는 명제로 나아간다.

박 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복수는 나의 것’ ‘박쥐’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아가씨’ 등을 통해 멜로, 범죄, 복수, 추리, 판타지가 별도의 구분 없이 혼재하는 괴이한 광경을 연출했다. 세상 만사도 마침 그러하지 않은가. 비단 예술보다 극악한 현실의 사건 사고가 줄을 잇는 가운데, 서래와 해준은 서로에게 미친 나머지 대단히 미친 선택을 했다. 주체로서의 사람은 객체에 미쳐있을 때 어쩌면 더 아름다운 법이리라. ‘헤어질 결심’은 이 언어와 이 감정 그대로, ‘미(美)친’ 영화다.



[티브이데일리 이기은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영화 포스터,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