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감독, '정이'의 의미 [인터뷰]
2023. 01.24(화) 10:00
정이 연상호 감독
정이 연상호 감독
[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연상호 감독에게 ‘정이’는 단순히 자신의 필모그래피 중 하나인 작품이 아니었다.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운명’이었다.

지난 20일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정이’(감독 연상호)는 급격한 기후 변화로 폐허가 된 지구를 벗어나 이주한 쉘터에서 발생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설적인 용병 정이의 뇌를 복제, 최고의 전투 AI를 개발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SF 영화다.

이번 작품은 영화 ‘부산행’ ‘반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 등의 작품을 통해 독창적인 세계관을 선보였던 연상호 감독의 첫 SF 영화다. 연상호 감독은 고전적인 멜로영화 형식의 SF 영화를 만들자는 마음으로 ‘정이’를 시작했다. 연상호 감독은 이에 대해 “애초에 고전적인 멜로와 SF가 결합이 되면 어떨까 생각을 했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연상호 감독은 SF를 멜로로 풀어낼 생각을 했을까. 연상호 감독은 이에 대해 “멜로 감수성은 캐릭터 간의 감정을 많이 다루는 거라고 생각한다”면서 “실존하는 지옥에 갇힌 엄마 정이(김현주)와 그의 나이 많은 딸 윤서현(강수연)의 관계가 감정적인 것들을 불러일으키기 좋은 소재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영화의 출발이었다”라고 했다. 또 연상호 감독은 “단순하게 슬픈 감정이라기보다는 여러 결의 감정을 풀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이유는 또 있었다. SF가 낯선 어른 세대들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서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엄마와 딸, 모성과 효심이라는 언뜻 보면 보편적인 서사지만, AI로 복원된 엄마, 이를 연구하는 딸이라는 SF 소재로 풀어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연상호 감독은 “보편적인 서사지만 그 안엔 가볍게 볼 수 있는 주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주 편하게 볼 수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곱씹을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다는 게 기획이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문제는 만들고 싶은 것과 그 이외의 현실적인 요소들의 충돌이었다. SF 특성상 수백억 원 대 제작비가 투입돼야 하는 프로젝트였지만, 완성된 영화는 그 제작비에 어울릴만한 결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연상호는 “제대로 구현되기 위해서 상당한 제작비가 필요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상당한 제작비가 들어가는 작품이라면 그만큼 실적을 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그 정도 제작비가 들어가는 영화면 종합엔터테인먼트라고 생각한다. 한 편에 여러 가지를 즐길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정이’는 그런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라고 했다.

이어 연상호 감독은 “그래서 굉장히 오랫동안 컴퓨터에 한 폴더 안에 있던 시나리오였다. 쉬는 날 옛날에 썼던 걸 돌이켜 보는데 이 작품을 한다면 윤서현 역할을 누가 하지 생각했는데 그러다가 강수연 선배가 생각이 났다. 강수연 선배가 SF에서 고전적인 멜로를 보여준다면 컨셉추얼 한 영화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같이 작업을 하던 넷플릭스에 이야기를 했다. 해보자고 이야기를 해서 그때부터 구체화됐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故 강수연의 출연이 확정되면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정이’ 프로젝트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연상호 감독은 이에 대해 “강수연 선배의 우아하고 고전적인 톤의 연기가 제가 생각했던 영화와 시너지가 났던 것 같다. 강수연 선배의 연기가 중심이 됐으면 좋겠다는 게 동력이 됐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연상호 감독은 “‘정이’는 아이콘으로만 소비됐던 정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의 딸인 윤서현이라는 주인공을 통해 정이가 아이콘으로서 부여받았던 것들에서 탈피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윤서현이 해방시켜 주는 건 엄마를 해방시켜 주는 게 아니라 모성을 제거한 새로운 인물을 해방시켜 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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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장르는 연상호 감독에게 또 다른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장르 특성상 대부분의 장면을 CG로 구현해야 했던 탓에 촬영 당시에는 영화가 어떤 그림으로 완성될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고. 연상호 감독은 이에 대해 “촬영할 때 그린 스크린에서 그림을 그리기 힘든 상황에서 만들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CG 후반 작업으로 인해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철저하게 계획하고 촬영해야 했다고. 연상호 감독은 “전에는 영화를 찍을 때 이런저런 장면을 촬영하고, 나중에 뺐는데 이번에는 계획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면서 “어떤 인서트를 넣을 것인가 완벽하게 정하고 그 계획에 맞춰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정해진 플랜에서 벗어나면 뒷감당을 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완벽하게 짜인 상황에서도 배우들이 유연성을 가지고 연기를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때문에 처음 계획했던 그대로 작품을 완성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연상호 감독은 “원래 계획했던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면서 “세트를 목공으로 만든다. 겉보기엔 그럴 듯 하지만 걸을 때마다 소리가 난다. 그래서 전체 대사를 후시녹음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칠 수 있는 건 전혀 없었다. 원래 계획대로 갔어야 했다. 변한 건 없다”라고 했다.

‘정이’는 현재 SF 장르의 트렌드와는 다른 비주얼로 완성됐다. 사이버펑크 무드 속에서 구현된 쉘터는 모던하고 미니멀한 요즘 SF와는 조금 결이 다르다. 오히려 21세기 초반의 SF 감성과 더 맞닿아 있다. 이에 대해 연상호 감독은 “제 친구한테 ‘정이’를 슬쩍 보여줬더니 감독의 연식이 보인다고 하더라. 제 세대 SF는 ‘정이’와 같은 룩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프리 프로덕션을 할 때 사이버 펑크와 기계적인 것들을 많이 강조했다. 요새 유행과는 상관없이 내가 봐왔던 SF는 이거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고전적인 SF의 룩을 만들어냈던 것 같다”고 했다.

SF는 할리우드에서 끊임없이 작품이 제작될 정도로 익숙한 장르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한국형 SF 영화를 떠올리면 손에 꼽을 정도로 그 수가 많지 않다. ‘정이’도 한국형 SF 초기 작품이라고 분류될 정도로, 한국은 이제 막 SF 장르에 첫 발을 디딘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에 대해 연상호 감독은 “수많은 시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장르를 할 때에는 책임이 느껴진다. 한국 SF는 이제 시작인 것 같다”면ㅅ “앞서 몇 번의 시도들이 있었기에 이 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것 같다. 확실히 그 노하우들이 진화되는 속도가 빠르다고 생각한다. ‘정이’라는 작품의 노하우를 딛고 엄청나게 다른 작품들이 나올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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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연으로부터 시작된 ‘정이’는 엄마와 딸, 나아가 인간과 AI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등 다양한 메시지들을 품으며 SF로 풀어낸 멜로로 완성됐다. 아이콘으로만 소비되던 정이가 마침내 그것들에서 해방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던 연상호 감독의 초기 의도대로 완성된 것이다.

그런 ‘정이’의 시작이 돼 줬던 강수연은 안타깝게도 지난해 세상을 떠났지만, ‘정이’를 통해 오래도록 우리 곁에 남게 됐다. 이에 연상호 감독은 “이 이야기가 강수연 선배 본인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강수연 선배가 촬영 중에 자신은 4살 때 데뷔를 해서 어린 나이로 배우로서 인생을 시작해서 평범한 어린 시절이 없어 아쉽다는 말을 했었다. 당시에는 그 말에 크게 마음을 두지 않았는데 영화를 완성하고 나니까 강수연 선배 본인의 이야기인 것 같더라”고 했다.

연상호 감독은 “강수연 선배가 이 작업을 통해서 남은 여성에게 하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제 필모그래피를 하나 채우는 영화가 아니라 저한테는 운명 같은 특별한 영화가 됐다”면서 자신에게 ‘정이’가 갖는 의미에 대해 전했다.

[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news@tvdaily.co.kr/사진제공=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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