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황서연 기자] 지난 2000년 5월 첫 방송을 시작한 KBS1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은 매일 아침 밥상에 올라오는 갓 지은 따뜻한 쌀밥처럼, 평일 아침 시간을 굳건히 지키며 우리네 사람 사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25주년을 맞을 만큼 긴 시간이 흘렀고 방송 환경도 급변했지만 여전히 7~8%대 시청률을 유지할 만큼 꾸준한 시청자들의 사랑도 받고 있다.

최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KBS 본관에서 만난 '인간극장' 김영선 PD는 긴 세월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비결을 "평범함 속 특별함"으로 꼽았다. 지난 25년 간 똑같았던 전 국민이 알고 있는 오프닝 음악을 시작으로 펼쳐지는 따뜻한 내레이션, '인간극장'의 고유한 스타일이 돼버린 바탕체 흰 자막까지,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도 꾸준히 자리를 지키며 매 회 공들여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것이 주효했다는 설명이다.

김 PD는 "드라마도 2%대 시청률이 나오는 시절에 여전히 이런 성적표를 받을 수 있다는 건 결국 고정 시청층인 팬들의 끊임없는 사랑 덕분"이라며 "아침 시간대로 옮긴 2009년 이후, 이 시간에는 '인간극장'을 봐야 한다는 시청자들의 습관이 형성된 것 같다. 어찌 보면 OTT, 유튜브가 대세가 되기 전 자리를 잡아 다행"이라며 웃었다.

KBS1 인간극장

'인간극장'은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한 인물에 대한 짧은 다큐멘터리를 35분에 걸쳐 총 5회 방송한다. 5부작 짜리 하나의 에피소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기획 기간과 한 달 간의 촬영 기간, 2주 간의 편집 기간까지 더해 짧으면 8주, 길게는 10주라는 긴 시간이 소요된다. 외주 제작사 타임프로덕션, 제3비전이 각각 팀을 꾸려 총 10명의 PD, 8명의 작가가 양질의 방송을 만들기 위해 발로 뛰고 있다.

"'인간극장'의 매력은 수십 년을 해도 매번 새로운 스토리,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이에요. 분명히 일반인이신데 드라마 같은 인생 서사가 나오니 시청자분들도 쉽게 공감하며 편하게 시청하실 수 있죠. 결국은 재미가 있기 때문에 꾸준한 시청자 층이 있지 않나 싶어요. 타인의 삶을 관찰하는 건 언제나 재밌는 일이니까요."

다만 세월의 흐름 탓에 섭외 과정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특히 초상권에 대한 개념도 명확해지고, 개인의 영역이 더욱 확고해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인간극장'처럼 일반인을 조명하는 프로그램은 발 빠르게 변신을 꾀해야 했다. 김 PD는 "나를 드러내지 않고 싶은 분들도 많지만, 반대로 내 일상을 공개하겠다는 SNS 글, 유튜브 영상도 폭발하는 것이 지금의 시대다. 내 일상을 타인에게 공유하고 보여주고 싶은 양가적인 욕망이 존재하는 거다. 이런 분들을 계속 찾아내며 '인간극장'의 수명을 연장해 왔다"라고 말했다.

김 PD는 "예전에는 시골 아무 섬이나 들어가서 '독특하신 분 없나요'라고 물어서 섭외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라며 웃었다. 하지만 지금은 제작진도 시대에 발맞춰 SNS, 유튜브 채널을 토대로 출연자들을 찾아낸다. 김 PD는 "제작진의 눈은 다르다. 구독자가 단 10명이어도 재미있을 법한 포인트를 잡아낸다"라며 아직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들을 원석처럼 발굴해 낸다고 말했다. 여기에 여전히 일주일에 서너 개는 도착하는 정성 가득한 손 편지를 통한 제보까지 더해지면 지금의 '인간극장'이 완성된단다.

KBS1 인간극장, 김영선 PD

지금까지 1000명 이상의 출연진이 거쳐간 '인간극장', 전 국민이 알고 사랑해 온 프로그램인 만큼 국내 다큐멘터리 계에서는 무소불위의 섭외력을 자랑한단다. 일례로 지난 5월 '인간극장'에 소개된 '고맙다, 다섯 쌍둥이' 편의 국내 최초 자연임신 다섯 쌍둥이의 경우, 국내 모든 방송사가 모두 분만이 이뤄지는 대학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출연진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프로그램은 '인간극장'이었다고. 김 PD는 "공영 방송의 힘이자 '인간극장'이 가진 브랜드의 힘인 것 같다"라며 "국내의 어지간한 다둥이들은 모두 '인간극장'을 거쳐갔을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또한 지난해 10월에는 국내 최초로 네 쌍둥이를 낳은 부부의 뒤늦은 결혼식 현장을 '우당탕탕 네 쌍둥이 육아전쟁' 후속편이 전파를 타기도 했다. 김 PD는 "제작진이 보통 한 번 촬영을 하고 온 분들과는 오랜 시간 계속 연락을 하며 친구처럼 지낸다. 자연히 서로의 근황을 알게 되고, 그러던 중 어느 순간 계기가 생기면 후속편 촬영이 진행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들 네 쌍둥이 부모의 경우에도 방송 출연 후 2년 간 제작진과 꾸준히 연락을 주고 받던 중 결혼식 소식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 제작진이 카메라를 들게 됐다고.

지난 5월 방송한 소아 조로증을 앓고 있는 홍원기 군의 후속편, '스무 살이 된 어린 왕자' 또한 10년 간 꾸준히 연락을 취하던 담당 PD가 홍원기 군의 보스턴 마라톤 참가 소식을 듣고 제작을 시작하는 등, 후속편의 대부분은 제작진과 출연진 간에 형성된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촬영이 성사된다. 특히 온라인에서 수년 전 방송이 다시금 화제가 되는 경우 등 출연진의 근황이 궁금해지는 경우에도 제작진이 출동한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이미 세상을 떠난 출연자들의 부고 소식을 접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요람부터 무덤까지, 인간의 삶을 제삼자의 눈으로 지켜보아야 하는 위치에 서있기에 생기는 슬픔이다.

"제작진들 사이에서도 '인간극장'을 오래 만드신 분들은 '성인군자' 같다는 표현을 많이 해요. 생과 사, 수많은 희로애락을 지켜보시는 분들이니까요. 특히 가족과 하루 종일 붙어 있기도 어려운데, 촬영 감독님들은 낯선 사람과 한 달을 부대끼며 촬영을 하시고 서로 마음을 열고 편안해지는 과정을 담아내는 분들이잖아요. 그분들이 출연자를 대하는 마음이 진심이 아니고, 또 선하지 않다면 결코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없어요. 그래서 항상 '인간극장' 감독님들을 존경한다고 말씀드리죠."

KBS 인간극장, 김영선 PD

25년 장수 프로그램, 자칫 식상할 수도 있는 '인간극장'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제작진은 오늘도 머리를 맞대고 고민 중이란다. 기존의 출연자들이 주로 가족 중심의 서사를 펼쳤다면 혼자 사는 사람, 싱글이 많아진 세태를 반영하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삶을 꾸려 나가는 젊은이들의 일상을 소개하고 싶다는 이야기도 이어졌다. 김 PD는 "식상하다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다루는 인물들은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다. 시대가 바뀌면 사람들의 삶의 양식도 또 바뀐다. 10년 전 태어난 쌍둥이와 지금 태어난 쌍둥이는 엄연히 다른 환경에 산다. 그런 차이를 담아내는 것도 '인간극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인간의 생로병사가 반복되는 한 '인간극장'의 힘도 무한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수많은 콘텐츠의 범람 속에서 '인간극장'은 바다 위 부표처럼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 특별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라는 기획 의도에 맞춰 누구나 편하게, 언제든지 시청할 수 있는 양질의 콘텐츠를 제작하는 데 집중하겠다는 포부다. 김 PD는 "휴먼 다큐멘터리는 한국에서 유독 발달한 장르다. 한국인들은 정(情)이 많고 공동체 의식이 강하지 않나. 이런 특성들이 타인의 삶에 대한 공감으로 계속해 이어질 것"이라며 "물론 25년 전 '인간극장'과 지금의 '인간극장'의 결은 약간 다르겠지만,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본질적인 분위기를 지켜나가면 지금보다도 더 장수하는 프로그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라고 말했다. "갑자기 '인간극장'이 보고 싶을 때 아무 편이나 틀어서 시청해도 기쁨과 감동을 얻을 수 있도록, 언제든지 잘 먹을 수 있는 쌀밥을 지어 놓을 테니 언제든 와서 먹어달라"는 살가운 당부도 남겼다.

[티브이데일리 황서연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안성후 기자,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