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서울이라는 차가운 도시에서, 은호(구교환)와 정원(문가영)은 서로에게 ‘집’이 되어주었다. 비좁은 자취방에서 라면 하나를 나눠 먹어도 행복했고, 불안한 미래 앞에서도 맞잡은 두 손만큼은 따뜻했다. 하지만 사랑만으로 버티기에 현실의 무게는 가혹했다. 성공을 증명하고 싶었던 은호의 조급함과, 그저 소박한 안정을 바랐던 정원의 외로움은 점차 엇갈리기 시작했다.

서로에게 아픔으로 남은 지하철 역에서의 이별 이후 10년 만에 재회했다. 다시 마주칠 거라 생각한 적 없었는데, 우연한 재회는 지난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그때의 우리는 서로를 놓친 걸까, 아니면 놓은 걸까.

31일 개봉되는 영화 ‘만약에 우리’(감독 김도영)는 중국 영화 ‘먼 훗날 우리’를 한국판으로 각색한 작품으로, ‘82년생 김지영’으로 연출력을 인정 받은 김도영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여기에 배우 구교환 문가영의 멜로 호흡으로 완성된 한국판에 대해 원작 팬뿐만 아니라 일반 관객들의 기대를 모았다.

원작이 존재하는 리메이크작은 태생적으로 ‘비교’라는 숙명을 안고 시작한다. ‘만약에 우리’는 원작의 아우라를 지키되, 한국적인 정서와 새로운 해석을 더해야 하는 난제를 어떻게 해결할지가 관건이었다. 이 줄타기 끝에 작품은 원작의 미덕은 계승하고, 아쉬움은 보완하며 ‘청출어람’의 모범 답안을 제시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원작의 시그니처인 ‘시간의 색채’를 그대로 차용한 점이다. 과거는 찬란한 총천연색으로, 재회한 현재는 무채색의 흑백으로 그려진다. 이는 단순한 시점의 구분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의 전부였던 시절을 지나, 사랑을 잃은 후 색채를 잃어버린 두 남녀의 황량한 내면을 시각화한 것이다. 멈춰버린 시간 속, 흑백의 세상에 갇힌 은호와 정원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아련한 슬픔을 자아낸다.

영화는 이 흑백과 컬러의 대비 속에서 두 사람의 연애 대서사를 밀도 있게 쫓는다. 첫 만남의 설렘부터 사랑이 깊어지는 순간, 그리고 차가운 현실의 벽 앞에 부딪혀 마모되어 가는 이별의 과정까지. 관객은 스크린 밖 관찰자가 아니라, 은호와 정원이 되어 함께 연애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원작이 지녔던 숨 막힐 듯한 감정의 밀도와 몰입감을 고스란히 재현해 낸 덕분이다.

특히 두 사람의 이별을 악역이나 거창한 사건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청춘의 빈곤’과 ‘불안’이다. 좁은 자취방에서 소소한 행복을 나누던 시절이, 성공에 대한 강박과 현실의 피로감으로 인해 서서히 균열이 가는 과정은 뼈아플 정도로 사실적이다. 사랑하기에 헤어진다는 상투적인 말이, 서로의 성장을 위해 놓아줄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서사 안에서는 가장 설득력 있는 비극으로 다가와 관객의 공감을 자아낸다.

무엇보다 ‘만약에 우리’가 빛나는 지점은 각색으로 메시지를 확장했다는 점이다.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소재인 ‘집’은 정원에게 결핍이자 목표, 그리고 사랑의 매개체다. 원작의 결말이 다소 수동적인 여성상에 머물러 아쉬움을 남겼다면, 한국판의 정원은 다르다. 그는 누군가에게 의탁하거나 불행한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 미처 매듭짓지 못한 과거와 ‘진정한 이별’을 고한 뒤 흑백의 세상을 다시 컬러로 물들이고, 비로소 스스로가 단단한 ‘집’이 되어 홀로 선다. 단순한 멜로를 넘어, 상실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주체적인 성장담으로 완성된 결말은 이 영화가 지닌 가장 큰 미덕이다.

이 견고한 서사에 숨을 불어넣은 건 구교환, 문가영 두 배우의 열연이다. 주동우, 정백연이라는 원작 배우들의 그림자가 짙었음에도, 두 사람은 자신들만의 호흡으로 지극히 한국적이고 현실적인 은호와 정원을 빚어냈다. 구교환은 특유의 리듬감 있는 연기로 은호의 감정선을 담아내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의 결을 완성하며 극의 공기를 환기하고, 문가영은 담담하면서도 단단한 정원의 내면을 섬세한 눈빛으로 그려내며 한층 깊어진 연기 스펙트럼을 증명했다.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이별과 납득할 수밖에 없는 재회, 눈빛만으로도 서사를 완성하는 두 배우의 시너지는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여기에 적재적소에 흐르는 임현정의 명곡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은 영화의 정서와 완벽하게 맞물리며 짙은 여운을 남긴다. 우리가 사랑했고, 아파했고, 끝내 떠나보냈던 모든 계절을 소환하는 ‘만약에 우리’다.

[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news@tvdaily.co.kr/사진=영화 '만약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