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이기은 기자] 많은 예술가들이 취미·습관·훈련처럼 편지를 쓴다. 편지란 수신인의 매력을 사려 깊게 가늠하는 일인 동시에 발신자 스스로의 감정을 돌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성찰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단초 역시 자신도 미처 몰랐던 내면을 관찰하는 일에서 비롯된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은 연상의 여인을 흠모하는 소년의 기록이며 괴테의 데뷔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샤를로테를 향한 괴로운 사랑의 행간에 다름 아니었다. 이밖에 숱한 문호, 유명인사가 선생, 동료, 연인을 향한 실질적 서간문 저서를 출간해온 것은 예술의 근간이 누군가를 연연하는 일이거나 자기 안의 원인불명 그리움을 마주하는 일임을 방증한다.

‘윤희에게’(감독 임대형·제작 영화사달리기)는 일본 오타루에서 한국의 평범한 중년여자 윤희(김희애)에게 도착한 편지 한 통을 기점으로 출발하는 영화다. 메가폰을 쥔 임대형 감독은 전작 ‘레몬타임’ ‘만일의 세계’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를 통해 일괄적으로 국내·해외 영화제 상을 휩쓴 30대의 젊은 창작자다. 연극영화학을 전공하고 대학교 강단에 서기도 했던 김희애는 작품의 상업적 성공요인을 가늠하는 대신, 감독의 여린 감수성과 시나리오의 세심함에 베테랑 연기자로서의 분별력을 ‘올인’했다.

설원의 풍경이 인상적인 일본 로케이션 촬영분량은 스크린 전반을 차분한 정서로 요약해낸다. 카메라는 오타루 현지 곳곳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윤희의 측면 얼굴을 빈번히 응시한다. 콧날이 산맥처럼 우뚝 서 있고 우수에 찬 눈빛이 강점인 배우 김희애는 영화 중반부를 넘어설수록, 대사와 표정 곳곳에 진한 악센트를 주는 평소 연기 패턴에서 벗어난다. 옛 인연을 가슴에 묻어둔 ‘윤희에게’의 향수(nostalgia) 정서에 따라, 작품 속 김희애는 정면승부 아닌 감정적으로 우회하는 연기 방식을 택했다.

고등학생 딸의 흡연을 초연히 다룰 수 있게 된 윤희의 연륜은 사사롭지만 낯설지 않은 디테일이다. 모든 이의 삶은 매순간 고결하지만은 않고, 웅크린 일상을 견뎌낸 윤희 역시 전 남편의 재혼 소식에 시원섭섭한 회한을 토해내기도 한다. 그만큼 윤희는 오래도록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개인 신변을 비밀에 부친 채 살아왔다. 영화는 그런 주인공의 누적된 세월, 기억, 한(恨)의 정념을 흰 눈밭에 피어나는 숨결처럼 감미롭고 청량하게 기록해낸다.

무엇보다 ‘윤희에게’의 강점은 스토리의 시작점인 편지를 마지막 신(scene)으로 연계하는 수미상응 내러티브다. 옛 지인인 쥰(나카무라 유코)이 보내온 편지는 전개 단계에, 여기에 감응하는 윤희의 답신은 대단원 구간에 배치해낸 이 전략적 한 수는 무엇을 뜻하는가. 삶이란 자주 어렵고 복잡했을지언정 분연히 써내려가곤 했던 편지임을, 그 순간 편지의 발신인과 수신인의 마음은 기적처럼 동질적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일 것이다.

본질적으로 외로웠던 한 영혼과 또 다른 영혼의 만남, 그렇기 때문에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사라져버릴까 전전긍긍했던 시간들. ‘윤희에게’는 유예된 사랑이나 실연의 앙금을 흘려보내는 일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그럼에도 내가 그 시절의 나와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는 영화다. 설명하거나 종용하지 않되 벅차게 지탱해온 지난날을 토닥이는 일. 어쩌면 윤희의 답신은 회의와 자책으로 겹겹이 누적된 생의 한가운데에서 모두에게 한사코 절실했던 위로 한줌일지도 모른다. 글재주는 없다고 자평하는 윤희의 추신조차 무척 새초롬하고 아름답다. “나도 가끔 네 꿈을 꿔”.



[티브이데일리 이기은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포스터, 영화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