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윤정희 영면, 삶은 '시'처럼 아름답지 않아 슬프다 [무비노트]
2023. 01.30(월)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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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데일리 김지현 기자] '영화처럼 살다 간 사람'

누군가의 묘비명에 이 같은 글귀가 새겨졌다면, 혹자들은 고인의 생애가 꽤 낭만적이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일상의 비루함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화려한 수식어지만 당신이 익히 아는 것 처럼 산다는 건 녹록치 않다. 무덤가에 그득 핀 잡초처럼 질긴 사연으로 채워진 것이 우리의 삶이다.

원로 배우 윤정희가 30일(한국시간) 제2의 고국인 프랑스 파리에서 영면에 들었다. 향년 79세. 화장된 유해는 뱅센 묘지에 안치된다. 이날 오전 한국에서는 일부 유족의 뜻에 따라 한 성당에서 위모미사가 열리기도 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은막 스타의 죽음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어쩐지 그의 죽음은 슬프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영화처럼 살다 간 故(고) 윤정희 마지막은, 유작 ‘시’를 꼭 닮은 고인의 죽음은 때로 인생이 산 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 같아 아프다.

“시상은 대체 언제 떠오르는 거에요?”

영화 ‘시’(2010, 이창동 감독)의 주인공, 미자의 대사 중 하나다. 홀로 손자를 키우는 미자는 요양사로 생계를 이어 가는 가난한 할머니지만 외출을 할 때면 봄 기운이 물씬 풍기는 스카프를 두를 줄 아는 멋쟁이다. 동네 문화 센터에서 ‘시 쓰기’ 강의를 듣는 미자는 시를 쓰려 노력하지만 도무지 시상이 떠오르지 않아 선생님에게 영감에 대해 묻는다. 선생님은 "무엇이든 바로 보는 것 부터 시작해보라"고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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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미자는 세상을 바로 보려 노력한다. 주방 싱크대에 널부러진 설거지 더미도, 그 위에 걸린 고무장갑도 바로 보려하니 새롭다. ‘창문 사이 드리운 햇볕이 이렇게 예뻤나’ 미자는 생각한다. 빨간 사과를 손에 올려 골똘히 바라보기도 하고, 나뭇잎을 부대끼게 하는 바람도 다시 본다. 그래도 시상은 떠오르지 않지만 시를 쓰기로 결심한 후 미자의 세상은 달라져 있다. 미자가 변한 것인지, 세상이 변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느 날 미자는 (아직 시를 한 편도 쓰지 못했건만) 세상이 마냥 아름답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극단적 선택을 한 동네 여중생의 죽음에 자신의 손자가 관련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자의 세계엔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여중생의 비극스런 죽음과 그 죽음에 태연한 사람들 사이에서 서서히 자멸해 가는 미자는 이미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 더 이상 세상은 아름답지 않은데 미자는 한 편의 시를 완성할 수 있을까.

‘시’는 이창동 감독의 관조성이 극에 달한 영화다. 무미 건조함이 냉정해 보이기까지 한 작품이다. 영화는 강가 주변에서 노는 소년들과 여중생의 시신을 함께 비추는 것으로 시작된다. 천진난만하게 노는 아이들과 교복을 입은 채로 주검이 돼 물가에서 떠밀리고 있는 여중생의 시신이 한 공간, 한 프레임에 담겨 줌 백된다.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 묘한 불균형과 부조리가 ‘시’를 지배하는 시상이다. 영화에서 이 감독은 한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불가항력적인 잔인함을 차분하면서도 냉정히 들춰낸다. 애써 외면해 왔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사람들 앞에 그 잔인함을, 폐부를 무표정한 얼굴로 들춰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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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 3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왕성한 활동을 펼친 고 윤정희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한 후 본업 보다 학업과 가족과 보내는 시간에 더 집중했다. 프랑스 파리3대학에서 예술학 석사를 받고 남편의 세계 공연을 함께 다녔다. 딸 백진희 역시 음악가, 바이올리니스트로 키웠다. 2010년 ‘시’로 컴백하던 시기, 윤정희와 백건우의 기사 타이틀에는 언제나 ‘잉꼬부부’라는 제목이 붙었고, 이들이 파리에서 얼마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는지에 대한 내용이 실렸다.

역시 시선을 끄는 건 윤정희의 여전한 아름다움이었다. 60대 후반, 원로의 모습으로 다시 대중 앞에 선 그에겐 인위적이지 않은 기품이 흘렀다. 미자가 가난하지만 초라해 보이지 않았던 건, 시를 쓰는 동네 할머니라는 설정이 어색하지 않았던 건 그 어떤 배우도 흉내낼 수 없는 윤정희의 타고난 아우라 덕이었다.

부조리로 침범되기 전의 순수한 미자의 세계와, 배우 본연이 가진 기품은 서로 꼭 닮아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미자는 윤정희의 타고난 기품 덕에 처연하게 아름다웠고 그래서 더욱 안타깝고 잔인했다.

영화 '시'가, 주인공 미자가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산 자가 어찌할 수 없는 부조리와 아이러니가 잔인하게 느껴져서다. 이 부조리 안에 놓인 인간의 어찌할 수 없음이 무척이나 무기력해 잔인하다. 윤정희의 마지막도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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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후 적극 활동을 재개할 것으로 보였던 윤정희는 알츠하이머로 투병했고, '남은 생은 연기에 집중하겠다'는 마지막 소명을 끝내 이루지 못했다. 자신의 직업은 물론 딸 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면 단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민망한 웃음을 짓던 미자의 실없는 웃음이 생각났다.

고 윤정희가 프랑스의 한 자택에서 망각이라는 병마와 싸우는 동안 백건우와 딸, 고인의 친지들은 큰 갈등을 겪었다. ‘감금’, ‘횡령’ 등 양측의 자극적인 주장들을 실은 기사들엔 언제나 우아한 미소로 이창동 감독과 함께 영화를 얘기하며 환하게 웃는 윤정희의 얼굴이 함께 실렸다. 영화 만큼 부조리한 현실이었다.

영화는 원고지에 한 자, 한 자 눌러쓴 시를 미자가 읊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첫 장면이 비추던 그 강물과 함께. 140분에 달하는 영화 '시'는 배우 윤정희가 읊는 슬픈 산문같다. 부디 편히 쉬기를. R.I.P.

[티브이데일리 김지현 기자 news@tv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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