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연휘선 기자] "신인 배우 김형묵입니다". 배우 김형묵은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신예를 자처했다. 1999년 20세기 끝자락에 뮤지컬 '캣츠'로 무대에 데뷔한 베테랑 연기자가 드라마에서는 신인이었다. 생방송 같은 드라마 촬영 현장도 그저 신기하다는 김형묵은 늦은 데뷔만큼 미래가 기대되는 내공의 소유자였다.

김형묵은 지난 23일 종영한 SBS 월화드라마 '귓속말'(극본 박경수·연출 이명우)에서 송태곤 역으로 출연했다. 송태곤은 극 중 국내 최대 법무법인 태백 대표 최일환(김갑수)의 비서실장이었다. 그는 시작은 검찰이었으나 '스폰서 검사'로 명예롭지 못하게 법복을 벗었고 태백에 기생하며 법비(法匪, 법을 악용하는 권력 무리)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이에 자칫 조연 한 명으로 그칠 수 있던 송태곤이 김형묵을 만나 생동감을 얻었다. 김형묵은 손가락을 튕기거나 휘파람을 부는 등 재치 있는 동작에 능글맞은 표정 연기를 더해 송태곤을 매 회 지나칠 수 없는 감초로 만들었다.

그 시작은 '귓속말' 연출을 맡은 이명우 감독과의 인연이었다. 김형묵은 "개인적으로 이명우 감독을 알고 조금 더 활동 영역을 넓히고 싶어 고민하던 차에 '귓속말' 오디션 제안을 받았다"고 밝혔다. 과거 이명우 감독에게 다른 작품으로 출연 제의를 받은 바 있으나, 당시에는 조금 더 무대에서 실력을 갈고 싶다는 생각에 거절했는데 이를 좋게 본 이명우 감독이 다시 한 번 기회를 줬던 것이다. 김형묵도 주인공 신영주(이보영)와 이동준(이상윤)의 로맨스와 더불어 법비들을 응징한다는 '귓속말'의 줄거리에 반했고, 박경수 작가의 전작을 모두 재미 있게 본 터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고.

특히 김형묵에게 '귓속말' 출연은 "도전"이었다. 지난 1999년 뮤지컬 '캣츠'를 통해 뮤지컬 배우로 데뷔한 뒤 '금발이 너무해', '명성황후', '카르멘' 등에 출연한 김형묵이기에 연기 경력은 적지 않았지만, 진지하게 드라마에 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김형묵은 "촬영 현장의 모든 게 즐거웠다"고 강조했다. 그는 생방송처럼 쫓기듯 촬영하는 바쁜 일정조차 즐겼다. 밤샘 촬영과 기약 없는 촬영 대기 시간도 그에겐 생소했으나,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는 신인인 만큼 모든 것에 감사하고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이 가운데 김형묵이 연기하며 제일 신경 쓴 부분은 "자연스러움"이었다. 김형묵은 "워낙 무대에서 연기하던 게 남아 카메라 앞 연기와 이질적인 부분이 있을까 고민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스스로 감을 잡고자 다양한 시도를 준비했다. 이동준 역의 이상윤과 호흡할 때, 최일환 역의 김갑수와 대사를 주고 받을 때 등 매 순간 다른 연기를 시도해봤다"고 설명했다. 이어 "다행히 이명우 감독이 너무 편하게 대해줬고 연기자가 준비한 것들을 지지해줬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 중에서도 김형묵이 가장 신경 써서 준비한 장면은 단연 첫 등장 신이었다. 김형묵은 "모든 장면이 다 기억에 남는다"면서도 "그럼에도 첫 장면은 제일 기억에 남는다. 그 때는 곳곳에 저만의 드립을 깔았다"고 말했다. 극 중 송태곤이 첫 등장 신에서 신념을 져버린 이동준을 향해 비웃는 표정으로 손가락까지 쓰며 놀리듯 대사를 말한 것도 모두 김형묵이 철저하게 준비한 연기였다.

김형묵이 표정, 몸짓, 발성 등 세심한 부분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된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어린 시절 교회와 학교에서 연극을 하며 자연스레 배우의 꿈을 키웠고 서울예술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며 본격적으로 연기를 업으로 삼게 됐다. 김수로, 라미란, 이종혁 등 현재 왕성하게 활동 중인 배우들도 서울예대 시절 동기로 만났다.

김형묵은 쟁쟁한 스타들이 즐비한 대학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 좋은 스승을 찾아 발품을 팔았다. 그는 "지금이야 목소리가 좋다고들 해주시지만 대학 때는 '발성 때문에 배우 못한다'는 말까지 들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대사 한 마디만 하면 목이 나갔다"며 "발성 훈련만 해도 많이 공을 들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성 클래스부터 스승님까지 찾아 다녔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어렵게 배운 연기인 만큼 김형묵은 대학 졸업 후 무대에 서는 것부터 연기로 활동하는 모든 순간을 만끽했다. 그는 연극 배우에게 고질적으로 따라 오는 경제적 어려움에 대해서도 "지금 생각해보면 힘든 순간이었지만 그 때는 딱히 힘들다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그는 "더 힘든 사람도 많을 거라 생각하며 긍정적으로 버티고자 했다. 나름 열심히 벌기도 했다"며 웃는 여유를 보였다.

이처럼 고단했던 시간도 웃어 넘길 정도로 김형묵은 연기 그 자체에 대해 강한 애착을 보였다. 연기 강사로 활동했던 것조차 "연기는 누군가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라 함께 나누는 것"이라 표현한 그였다. 이에 김형묵은 배우로 생활하며 마주한 모든 연기와 관련된 순간들을 메모하고 기록하며 훗날 책으로 발간하겠다는 포부도 다졌다. '귓속말' 촬영 중에도 틈틈이 나름대로 느낀 바를 메모하고 기록해뒀다고.

그런 김형묵이기에 어떤 연기도 가리지 않았다. 김형묵은 "제가 연기 욕심이 많기도 하지만, 주어지는 대로 잘 해내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제가 체격도 있고, 목소리도 두꺼운 편이라 그런 외형에 어울리는 배역을 우선적으로 할 수 있겠지만 제 안에는 수많은 제가 있다"고 자부했다.

무엇보다 김형묵은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며 자신이 얻게 될 영향력을 사회적으로 좋은 일에 쓰고 싶어했다. 그는 "배우는 어찌 보면 사회적 기업가 같기도 하다"고 생각을 밝혔다. 그는 "배우가 공인(公人)은 아니지만 대중에게 영향을 끼지는 존재라는 점에서 기왕이면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첫 드라마인 '귓속말'을 통해 벌써 유기견 봉사활동을 위한 파티에 다녀왔다는 그였다.


배움의 시간부터 무대 위 경력에 가리지 않는 열정, 그리고 선한 의지까지. 이쯤 되면 왜 이제야 드라마에 얼굴을 비췄는지 아까울 지경이다. 과거의 노력을 낮추고 겸손하게 '귓속말'의 신인을 자처한 김형묵의 다음 행보를 기대한다.

[티브이데일리 연휘선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신정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