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섣불리 특정 청원에 끼어든 것 아니냐는 지적에, 수지는 ‘휴머니즘에 대한 나의 섣부른 끼어듦’이라는 멋들어진 답으로 응한다. 일각에서는 수지의 글 솜씨가 아닌 것 같다는 딴지를 걸기도 하지만 설사 그러한들 어떠하랴. 누가 써 줬든 아니든, 자신의 영향력을 사용하여 페미니즘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의 문제라고 이야기해준 그녀의 마음이 기꺼울 따름이다.

유튜버 양예원 씨는 과거 피팅모델로 일할 당시 합정의 어느 스튜디오에서 카메라를 든 다수의 사람들에게 수치스러운 포즈의 촬영을 요구 당하는 건 물론이고 성추행까지 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 찍힌 사진들이 음란사이트에 유출되어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을 견디고 있다고. 그녀가 이렇게 밝힐 수 있는 까닭은 앞서 용기 있는 걸음을 걸어간 이들의 존재와 주변 사람들의 응원과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픈 기억에 대해 받을 거 다 받고 찍을 거 다 찍었으면서 뒤늦게 무슨 소리냐는,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냐는 식의 섣부른 진실공방을 벌이기 전에, 수지의 청원 참여를 놓고 섣부르게 왈가왈부하기 전에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이다. 특히 전자의 것은 솔직히 입장을 바꿔 조금만, 아주 조금만 생각해보면 내뱉기 힘든 소리들이다.

이십대 초반의 배우 지망생, 아무리 영악하다더라도 사회 초년생, 딱 그만큼의 순진함을 지니기 마련인데, 배우를 꿈꾸는 사람으로서 듣기 좋은 칭찬인 외모에 대한 호평을 듣고 가능성이 보인다며 잘만 하면 빠른 길도 제시해줄 수 있다 한다. 그리고 내밀어진 흰 종이, 잘은 모르지만 여러 조항들이 적혀 있는 계약서란 건 알겠다. 자세히 읽어볼 여력도, 정신도 없는 그녀는 혹여 좋은 기회를 놓칠 세라 펜을 들어 사인을 했고, 이게 불행의 시작점이 되었다.

배우는 천의 얼굴을 가져야 한다, 그가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더라면 계약이고 촬영이고 하지 않았을 테다. 심해도 너무 심한 콘셉트에 거부 의사를 표하자 돌아온 건 위협적인 분위기와 겁박이었다. 겁은 먹을 만치 먹었고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은 없었다(어린 눈으로 보기에). 최악에서 조금이라도 덜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수밖에.

그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추측해본 상황이다. 도통 ‘받을 거 다 받고 찍을 거 다 찍었으면서’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성폭력은 남성과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임을 되짚어보며 상황을 살짝 바꿔 보겠다. 상사에 의해 받은 스트레스와 과중한 업무로 일상생활을 못할 정도로 심각한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에게 상사가 ‘받을 거 다 받고 시키는 거 다 해놓고 이제 와서 누구 핑계를 대냐, 본인 건강관리는 스스로 알아서 해야지’라고 한다면 어떤가.

위협적인 분위기와 상사의 압력, 얼핏 달라 보이지만, 불의하고 불합리한데도 고용되었다고 을이라고 고스란히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단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은 경우다. ‘미투’ 운동이 계속되면서 엄연한 범죄인 성폭력을 자꾸 성 대결로 끌고 가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 움직임을 주도하는 이들은 여성이 대부분이란 이유로 피해자를 옹호하거나 피해자를 위해 목소리를 크게 내는 사람들을 페미니스트라 부르며 적대시한다.

페미니스트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단어도 아닐 뿐더러, 피해자의 대부분이 여성인 것은 우리 사회의 권력 구도가 아직까지 남성 중심인 탓인데 이런 진지한 고찰 따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페미니즘이 아닌 휴머니즘이라고 제대로 짚어 준 수지의 글이, 논란이 일 것을 감수하고도 써내려간 그녀의 단단한 마음이 더없이 귀하다. 자칫 남녀의 성대결에 휩쓸려 사라질 뻔한 피해자의 아픔이 화제의 중심으로 완벽히 떠오를 수 있었으니까.

미처 가늠치 못한 일이 생기기도 했다. 상호가 바뀌는 바람에 상관없는 스튜디오가 손해를 본 것이다. 비록 수지의 ‘섣부른 끼어듦’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피해를 입은 분들을 위하여 정정은 반드시 필요하기에 그녀는 곧바로 사과문을 게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섣부른 끼어듦’의 가치가 퇴색될 수 없다. 문제의 본질을 끄집어내어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자각하게 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까닭이다. 스타의 영향력은 이렇게 사용되어야 하는 법이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조혜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