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신예라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색깔 있는 연기를 선보인 ‘이설’의 앞날은 촉망 받아 마땅하다. 물론 배역 자체가 뛰어난 지능을 가진, 양부모가 죽었는데도 슬픈 기색 하나 없는 사이코패스라는 선명한 설정을 지닌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작품의 여주인공으로서 대선배인 신하균에게 절대 밀리지 않는 연기력을 보였다는 점에서 충분한 시선을 끌 만하다.

암흑으로 가득한 세계에 선한 가치를 지키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 응하는 악인이 존재하기 마련, 오늘의 악인은 이전과는 다르다. 대놓고 낌새를 풍기지 않으며 뛰어난 통찰력으로 선인지 악인지 모호한 입장에 서 있다. 이는 그만큼 도덕률이 희미하고 모호해진 현시대를 반영하는 것이리라. 그런 까닭인지 이러한 악인을 다루는 작품에서 잡히는 놈은 조무래기에 불과, 진짜배기는 잡히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드라마 ‘나쁜 형사’의 ‘은선재’도 마찬가지다. 양부모를 잔인하게 살인한 것에 일말의 죄책감이 없을 정도로 악인이지만, 그 이면엔 연쇄살인마로 인해 끔찍한 경험을 해야 했던 아픔과 양부모로부터 받은 학대의 고통이 존재한다. 누구라도 그녀 속에 온 몸이 피로 범벅이 된 채 웅크리고 있는 외로운 아이를 보게 되면 측은지심이 발동할 수밖에 없고, 악인을 향한 기본적인 혐오 혹은 증오 또한 갖지 못하리라.

세상의 규칙 따위 가볍게 무시할 수 있고, 세상 사람들의 위에 있는 듯 거칠 것 없이 굴다가도, 상처와 고통을 공유한, 어떤 연대감 때문일까. 자신이 유일하게 인정하며 마음을 준 동시에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될 대상인 우태석(신하균) 앞에서는 본연의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 그에게만큼은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 시절의 여울(입양 전의 이름)이 된다. 이토록 깊은 사연으로 미워할 수 없는 악녀, 은선재를 배우 이설이 고스란히 담아냈더라.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외모에 검은 생머리와 붉은 입술, 어느 것에도 관심 없다는 듯한 무표정한 얼굴로 있다가 때때로 알 수 없는 미소를 슬며시 짓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어 공포스럽지만 매혹적이다. 그리고 감정 없이 단조롭게 또는 차갑게 툭툭 내던지는 말투와 고음도 저음도 아닌 적당한 높이의 음색, 어떤 상황에서도 긴장하거나 흥분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 목소리까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전히 구현화된 이설의 은선재다.

게다가 우태석, 신하균과 맞닥뜨리는 장면들은 대부분 어찌나 인상적인지. 그녀에겐 기자라는 직업조차 취미로 느껴질 정도로 마치 스토커처럼 우태석의 주변을 맴돌며 도움을 주다가도 장애를 주는데, 여기서 우리는 이 악녀에게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장난을 치는 여고생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부자연스러울 수 있음에도 이설은 은선재의 양가적인 마음과 아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악녀의 매력을 더함은 물론이고 이야기의 흥미를 돋우는 데에도 성공한다. 은선재란 인물을 제대로 숙지한 결과다.

탁월한 연기력으로 극 전체의 든든한 기반이 되어준 신하균의 역량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중심을 잘 잡아주었기에 신인에 가까운 여배우가 마음 놓고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으니까. 덕분에 역대 빌런들을 뒤따를 만한, 악인이라고 미워만 할 수 없는, 절대적인 매력의 악녀 캐릭터가 탄생했다. 시청률과 상관없이 형성된 마니아층이, ‘나쁜 형사’의 속편을 원하고 요구하는 이유가 아닐까. 이설의 은선재를 한 번 더 볼 수 있기를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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