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이기은 기자] ‘눈이 부시게’가 장르물이라는 사실 그 자체에 스스로 많은 것을 기대는 우후죽순 드라마 춘추전국시대 안에서, 유니크(unique, 유일하고 독특한)함을 간직한 수작으로 남게 됐다. 드라마는 12부작 내내 인간과 인생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을 견지하며 시청자들의 가슴에 잔잔한 에세이처럼 다가섰다.

19일 밤 방송된 JTBC 월화드라마 ‘눈이 부시게’(극본 이남규·연출 김석윤) 12회에서는 김혜자(김혜자), 김혜자(한지민), 이준하(남주혁), 김영수(손호준), 김상운(안내상), 이정은(이정은), 김희원(김희원), 이현주(김가은), 윤상은(송상은), 정영숙(정영숙)을 둘러싼 가족 시간 이탈 로맨스 결말이 그려졌다.

이날 혜자와 준하의 젊은 시절, 결혼 생활의 면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 같은 상황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70대 김혜자의 아들, 김상운의 회상과 오버랩되며 시청자들의 마음을 건드렸다.

평범한 부부가 그렇듯 준하의 아이를 임신한 혜자는 행복했다. 하지만 시련이 혜자를 덮쳤다. 준하가 갑작스레 목숨을 잃었고 이후 혜자는 크나큰 상처를 덮고 외아들 상운과 삶을 헤쳐 나가야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크고 작은 삶의 고난들 속에서 마음 한 구석이 넝마가 된 채로, 여생을 견뎌내곤 한다. 그러나 혜자의 뇌 속에서 기억은 상처이기도 했지만 윤색될 만큼 행복한 순간도 적지 않았다. 드라마 최종회는 그런 혜자의 일생을 보편적으로 환기하며 시청자들 사이 공감대 형성에 일조했다.



‘눈이 부시게’는 주어진 시간을 다 써보지도 못하고 잃어버린 여자 김혜자(김혜자, 한지민 1인 2역)와 누구보다 찬란한 순간을 스스로 내던지고 무기력한 삶을 사는 남자 이준하(남주혁)까지, 같은 시간 속에 있지만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두 남녀의 시간 이탈 로맨스라는 기획으로 출발했다.

외피는 한눈에 보기에도 수출 겨냥용 판타지 형태의 한류드라마로 출범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눈이 부시게’는 회를 거듭할수록 색다른 톤으로 베일을 벗으며 시청자들을 매혹시켰다.

극 초반부 25살 혜자는 괴롭거나 슬픈 일이 벌어질 때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시간 이탈을 시도하는 판타지적 인물이었다. 이러한 설정 자체만으로도 배우 한지민, 남주혁의 풋풋한 청춘 기류, 그 나이대 청춘들의 고단한 일상과 맞물려 때론 동화 같고 때론 문학소설 같은 감수성이 십분 증폭된 편이다.

하지만 그보다 매력적인 후반부 반전이 브라운관을 흔들었다. 혜자의 시간 이탈은 인간의 뇌리 속에서 벌어지는 상상이었으며 혜자는 25세 청춘이 아닌 실제 70대 노인이었다. 그가 치매(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시청자들은 파토스(전율)에 사로잡혔다. 다수의 드라마들이 반전을 표방하지만 이제껏 이토록 현실적이고 핍진한 반전 결말은 없었다는 것이 현 방송 관계자들, 드라마 마니아들의 중론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노화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있는 삶의 섭리이며, 스토리 세계에선 중요한 문학적 포인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드라마가 채택한 제재 알츠하이머는 사람들로 하여금 삶과 죽음, 젊음과 노화, 사랑과 상실, 상처와 치유 등 여러 극단의 면모들을 상기·가늠케 했다. 스토리텔링의 반전 효과는 물론, 메시지를 담보하는 차원에서도 전략적 극본 선택이었던 셈이다.

무엇보다 김혜자의 뇌리를 파노라마처럼 스치는 삶의 회한, 환희, 고통들이 섬세하게 묘사되며 시청자들의 마음을 자주 울렸다. 혜자의 뇌리 속 이 모든 감정들은 그 자체로 우리 모두의 경험치다. 특히 삶의 고통을 끝없이 겪는 남주인공 준하의 상황이 혜자의 감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설정은, 타인들에게 마음을 주거나 다치거나 행복을 얻는 세상사의 진리를 상징적으로 스케치하는 대목이었다.

‘눈이 부시게’ 특유의 따뜻한 에세이적 대사야말로 이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인 일등공신이다. 사려 깊은 작가의 필체 덕분에 삶 속에서 갖은 희노애락을 겪는 시청자 모두가 드라마의 디테일에 공감했고 울고 웃을 수 있었다.

때론 나를 할퀸 저 사람이, 이 집단이, 이 세상이 몹시 아프고 증오스러울 때도 있다. 그럼에도 뒤돌아서면 사람에게 치유 받곤 하는 짧은 기적을 누구나 겪어온 것이 인생이었던가. 드라마의 최종 전언도 그런 것 아닐까. 인간이란 말 그대로 ‘눈이 부시게’ 찬란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티브이데일리 이기은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포스터, JTBC ‘눈이 부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