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김지하 기자] 잘 나던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의 이미지가 한 순간에 무너졌다. 바탕이 되는 시청자의 투표 내용을 조작하나 정확이 드러나며, 이미 활동을 마친 프로젝트 그룹과 활동 중인 프로젝트 그룹 모두 비상 상황을 맞게 됐다.

2019년 가요계를 정리하며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은 CJ ENM의 음악 전문 채널 엠넷 ‘프로듀스’ 시리즈의 투표 조작 논란이다.

지난 7월 종영한 ‘프로듀스X101’에서 시작, ‘프로듀스48’을 포함한 전 시리즈로 논란이 번졌다. 역시 엠넷에서 만든 서바이벌 오디션 ‘아이돌학교’ 역시 의심 선상에 있는 상황이다.

해당 논란이 심각해진 이유는, 응원하던 연습생이 만족할만한 순위를 내지 못한 것에 대한 ‘단순 불만 제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구체적 증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있다. 이는 조직적 움직임에 의해 ‘고소·고발’로 이어지며 제작진이 구속 기소되는 초대형 상황으로 번졌다.

◆ 사건 개요

CJ ENM은 지난 7월 19일 엠넷 ‘프로듀스X101’ 최종회 방송 직후 투표 조작 논란에 휩싸였다. 프로젝트 그룹 엑스원(X1)으로 선발된 멤버들 간 득표 차가 일정 패턴으로 반복된다는 주장이 등장하며 이와 같은 의혹이 제기됐다.

시청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진상규명위원회는 연습생 20명 모두 모두 7494.442에 특정 숫자를 곱하면 해당 득표수와 유사한 값이 도출된다고 밝혔다. 1위 김요한의 경우 7494.442에 178을 곱하면 133만4010.68이다. 이를 반올림하면 그의 최종 득표수인 133만4011표와 일치한다는 식이다.

경찰은 같은달 26일 엠넷 측의 수사의뢰서를 접수받아 내사에 착수했다. 또 같은 달 31일 제작사인 CJ ENM 사무실과 문자투표 데이터 보관업체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해 온라인·문자 투표의 원데이터 등 투표 자료를 입수했다.

경찰 조사가 시작된 후에도 한동안 “수사 결과를 기다리겠다.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질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해 온 CJ ENM은 지난 11월 5일 제작을 담당한 안준영PD(프로듀서)와 김용범CP(책임 프로듀서)가 구속된 후 태도를 바꿨다. 공식 사과문을 통해 고개를 숙였다.

안PD와 김CP는 사기와 업무방해 혐의 외에 배임수재 및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까지 받고 있다. 배임수재와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와 관련해 경찰은 이들이 강남의 유흥업소에서 수천만원 규모의 접대를 받은 정항을 포착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 접대의 대가가 특정 출연진을 위한 투표 조작이라고 보고 있다. 다만 접대를 한 기획사의 연습생이 엑스원이나 아이즈원의 멤버로 합류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안전과는 지난달 14일 오전 업무방해, 사기, 배임수재, 청탁금지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된 안PD와 김CP를 검찰에 송치했다.

이들과 함께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함께 입건된 제작진 및 연예기획사 관계자 8명은 불구속 상태로 검찰에 송치됐다. 이 중 기획사 관계자 2명은 불기소 의견으로 넘겨진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이들을 검찰에 넘긴 뒤 윗선 수사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10여명을 입건했는데, 여기에는 CJ 고위 관계자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로부터 사건을 넘겨 받은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이영림 부장검사)는 지난 3일 안준영 PD와 김용범 CP를 업무방해와 사기 등 혐의로 구속기소 했다. 보조PD인 이 모 씨는 안 PD 등과 같은 혐의, 기획사 임직원 5명은 배임증재·배임수재·청탁금지법 위반 등 혐의로 불구속기소 됐다.

이들에 대한 첫 공판준비기일이 오는 20일 오전 10시 30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다.



안PD와 김CP의 구속 이후 CJ ENM의 ‘꼬리자르기’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된 바 있다. 방송가의 일반적 의사결정 구조상 제작진이 회사 주력 프로그램의 방향을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시각에서다.

윗선 수사와 관련해 지난 5일 경찰은 CJ ENM의 부사장 겸 엠넷 부문 대표인 신형관 씨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신씨는 그룹 내 CJ ENM 음악 콘텐츠 부문장으로 재직하면서 프로듀스 시리즈를 총 책임진 인물이다.

지난 26일 검찰은 안PD와 김CP의 구속 기간을 연장했다. 투표조작 실체를 파악하며, 혐의 입증을 위한 인적, 물적 증거를 정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건에 대한 결론은 두 사람의 연장된 구속 기간이 만료될 시점에 정리될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프로듀스48’의 시청자들 역시 지난 11월 26일 CJ ENM 소속 제작진과 출연자들의 소속사 관계자들을 사기,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 및 배임수‧증재 혐의 등으로 고발한 상태다.

◆ 엑스원‧아이즈원 향후 활동은? ‘의견 분분’

안PD는 경찰 조사에서 지난해 6~8월까지 방송된 ‘프로듀스48’과 올해 5~7월 방송된 ‘프로듀스X101’의 순위 투표 조작 혐의를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시즌3 시작 약 5개월 전인 지난해 1월부터 시즌4가 끝난 올해 7월까지 1년6개월 간 수십 차례에 걸쳐 강남의 유흥업소에서 접대를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 자리에는 여성 접대부들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프로듀스48’을 통해 데뷔한 아이즈원은 최근까지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의혹 제기 후 데뷔를 강행했던 엑스원 역시 국내외를 오가며 공연 스케줄을 소화 중이었다.

그러나 조작이 기정사실화되며 사실상 활동을 중단했다. 11월부터는 컴백 일정을 비롯해 예정돼 있던 굵직한 일정들을 모두 취소했다. 엠넷이 주최하는 ‘2019 엠넷 아시아 뮤직 어워즈’(MAMA)에도 나가지 않는 것으로 최종 결정됐다.

활동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CJ ENM 관계자는 티브이데일리에 “논의해야 할 내용이 많아 다각도로 논의 중”이라며 말을 아꼈다. 멤버들의 원 소속사와 위탁 매니지먼트사들도 멤버들과 함께 미래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중대한 사안이니만큼, 연일 다양한 추측들도 나오고 있다. 하루는 ‘해체’에 무게가 실리는가 하면, 또 하루는 “멤버들의 의견에 따라 11인(또는 12인)의 활동이 계속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돼, 혼란을 주고 있다. CJ ENM과 멤버들의 ‘극비 회동’이나, 원 소속사 관계자들의 회동 등이 이러한 추측의 주요한 소스가 되고 있다.

조작 정황이 더 구체화될 경우 ‘해체’가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많지만, 여전히 그룹을 유지해 나가길 바라는 관계자와 팬들도 있다.

내부 상황에 정통한 연예 관계자는 “어떤 결론이 나오건 멤버들의 피해가 최소화됐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이미 ‘조작’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데뷔의 꿈을 안고 노력해 온 어린 친구들에게 화살이 향하는 것”을 우려했다.

◆ 영광의 아이오아이‧워너원도 불명예

안PD와 김CP 등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경찰은 프로젝트 그룹 아이오아이와 워너원을 배출한 ‘프로듀스101’ 시즌1과 시즌2에서의 조작 정황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종회 투표 결과와 시청자 투표 데이터 사이에서의 차이를 발견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2016년과 2017년에 각각 데뷔한 아이오아이와 워너원은 방송가에 서바이벌 오디션 열풍을 불러일으킨 장본인들이다.

엠넷에서 시작, 지상파와 종합편성채널 등 모든 채널을 장악했다. 국내외에서 큰 인기를 끌며 해외 팬미팅과 콘서트도 줄을 이었고, 광고계에서도 이들에 주목했다.

이들의 영향으로 ‘프로듀스’ 시리즈에서 파생된 다양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지상파 등을 통해 송출됐고, 포멧 자체가 해외에 수출돼 중국과 일본 등에서 유사 프로그램이 방송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조작에 의해 탄생했을 가능성이 나오며, 방송 중이거나 향후 방송된 시청자 참여 오디션 프로그램 전반에 미칠 전망이다. 일부 시청자를 중심으로 ‘사기’에 따른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올해 하반기 재결성을 추진 중이던 아이오아이의 활동 여부 역시 불투명해졌다. 전소미 등을 제외한 멤버 대부분이 재결성에 합의, 연내 앨범 발매를 계획했지만 조작 논란이 심화되며 기약이 없는 상황이다.



◆ ‘더유닛’ ‘미스트롯’ 등 타 오디션 프로그램에도 불똥

시청자 투표에 제작진이 관여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해지며 엠넷의 ‘아이돌학교’ 등도 의심선상에 올랐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한 프로젝트 프로미스 나인 역시 활동 중이다.

‘아이돌학교’의 조작 의혹은 지난 10월 MBC ‘PD수첩’ 등에서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해당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가수 이해인 등이 출연 과정에서 겪은 각종 불합리한 점들을 폭로하며 심화됐다. 경찰 역시 이 프로그램의 조작 여부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엠넷 외에도 KBS2 ‘더 유닛’이나 MBC ‘언더나인틴’ 등 역시 아이돌 그룹을 뽑기 위해 기획된 프로그램들이 의심선상에 올랐다.

‘그럴 수도 있다’는 소위 ‘카더라’식 추측이 대부분이지만, 해당 프로그램들에 연습생을 내보냈던 연예 관계자들은 충분히 “의심할만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지상파의 오디션 프로그램에 연습생을 내보낸 한 가요 기획사 관계자는 “투표 조작까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편집상 불이익은 경험했다”라고 밝혔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제작에 참여한 기획사 소속 가수가 남녀 그룹 모두에 한 명씩 포함된 것을 놓고 말이 나오긴 했었다”고 했다.

또 다른 지상파 오디션 프로그램에 연습생을 내보낸 관계자 역시 편집이나 설정 상 조작을 의심했다. 해당 관계자는 “프로그램 기획 의도에 따라 어떤 팀에 소속되는지가 중요했는데, 사전 미팅 때 더 잘 되고 싶으면 특정 팀에 지원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향한 의심은 단순히 아이돌에 국한돼 있지 않다. TV조선 ‘미스트롯’ 등 트로트나 JTBC ‘슈퍼밴드’ 등 밴드 오디션 역시 시청자 투표를 통해 순위를 매긴 만큼, 결과 조작이 있을 수 있다는 의심이 나왔다.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의 경우 투명성과 공정성 확보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전방위적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

◆ ‘접대’에 대한 의견은 분분

‘조작’에 따른 시청자 우롱은 어떤 해명도 통하지 않은 명백한 ‘부정’이지만, ‘접대’를 바라보는 연예계의 시각은 분분하다.

‘접대’를 통해 이뤄진 조작으로 누군가 불이익을 봤기 때문, 분명 문제의 소지가 있지만 연예계와 방송계 종사자가 ‘친목 다짐’ 등을 목적으로 술자리나 식사자리를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 자리에서 소속 연예인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흔한 영업 수단이기 때문, 업계 종사자 대부분이 이러한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한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이는 단순히 연예 매니지먼트를 떠나 다른 분야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관행”이라며 “술자리 접대 등이 연예기획사 전반으로 번지면 걸리지 않는 사람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 ‘터질 것이 터졌다’…긍정적 효과도 기대

일부에서는 이번 논란을 “터질 것이 터졌다”라고 보고 있다. 한 연예 기획사 관계자는 “(프로듀스 시리즈가) 101명 안에 들기 위한 오디션에서부터 최종 11인 안에 들어가기까지의 과정 모두”가 투명할 수만은 없는 구조라고 밝혔다.

한편에서는 이번 조작시비가 긍정적 영향을 미쳐 서바이벌 오디션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번 논란을 통해 시청자들이 수동적 형태에서 능동적 형태로 진화했음이 드러났다. 응원하는 연습생을 위해 유료 문자 투표에 참여한 이들을 중심으로 진상규명위원회가 결성되는 등 적극적인 움직임이 나타나며 향후 프로그램의 공정성 확보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란 분석이다.

한 가요기획사 관계자는 “시청자와 팬들의 영향력이 커졌다. 수치를 바탕으로 한 구체적 증거를 가지고, 조직적으로 행동하며 제대로 된 ‘감시자’ 역할을 해주고 있다”라며 “이런 움직임은 향후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의 공정성과 정확성 확보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봤다.


[티브이데일리 김지하 기자 news@tvdaily.co.kr/사진=티브이데일리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