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박정민이 본 적 없던 '얼굴'을 꺼냈다. 매 작품마다 새롭지만, 이번엔 그 새로움의 차원이 다르다. 시각 장애라는 조건 위에 내면의 뒤틀린 감정을 겹쳐, 단순한 인물이 아닌 생채기 난 시대의 얼굴을 만들어냈다. 배우 혹은 출판사 대표, 여기에 작가까지 ‘N잡러’ 박정민의 모든 행보가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지난 11일 개봉된 영화 ‘얼굴’(감독 연상호)은 앞을 못 보지만 전각 분야의 장인으로 거듭난 임영규(권해효, 박정민)와 살아가던 아들 임동환(박정민)이 40년간 묻혀 있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로, 박정민은 극 중 임영규의 젊은 시절과 임동환을 연기하며 1인 2역 연기에 도전했다.

‘얼굴’은 박정민이 오래전부터 염원했던 작품이다.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부터 좋아했던 연상호 감독에게 영화 ‘염력’ 무대인사에서 우연하게 원작 책을 받았다고 했다. 처음 연상호 감독에게 매료됐던 것처럼, 그로테스크하게 표현한 캐릭터의 표정으로 가득했던 ‘얼굴’은 박정민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연상호 감독이 원작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했을 때, 박정민은 무턱대고 “그럼 나 좀 캐스팅해달라”라고 했다. 그때 “가만히 있어 보라”라고 박정민을 말렸지만, 연상호 감독은 훗날 그 약속을 지켰다.

순수 제작비 2억 원. 단편 영화 규모의 제작비는 당연스레 개런티에도 영향을 미쳤다. 평소 개런티에 한참을 못 미치는 액수에 박정민은 그야말로 쿨하게 “회식에 쓰셔라”라고 한 뒤 ‘노 개런티’로 ‘얼굴’에 출연했다. 배우들의 억대 출연료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요즘 제작 상황에 참 보기 드문, 그렇지만 박정민다운 선택이었다.

박정민에게는 출연료를 자발적으로 포기하면서까지 ‘얼굴’은 놓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연상호 감독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작품이란 확신이 있었고, 그 과정을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많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이미 원작에 매료됐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보지도 않고 출연을 결심했다는 박정민이다.

박정민은 전각 장인 임영규의 젊은 시절과 그의 아들 임동환을 연기하며 1인 2역에 도전했다. 1인 2역도 쉽지 않은데 시각 장애가 있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도 여간 만만치 않을 거라고 모두가 예상했지만 박정민은 아니었다. 일단 백탁 렌즈를 착용하는 것만으로 임영규의 시야처럼, 세상이 뿌옇게 보였다고. 그것만으로 연기하는데 큰 도움이 됐단다.

여기에 지팡이를 사용하는 임영규의 걸음걸이나 행동은 영상을 보고 배웠단다. 특히 지팡이 사용 숙련도에 따른 걸음의 속도까지 계산했단다. 여기에 시각 장애를 갖고 있는 아버지 옆에서 보고 자란 것들이 박정민에게 큰 도움이 됐다.

그렇다고 시각 장애에만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다. 박정민은 임영규의 뒤틀린 내면을 표현하는데 더 중점을 뒀다. 장애인에 대한 태도가 지금 보다 더 녹록지 않았던 그 시절의 임영규가 살아남기 위해 모멸감을 느껴가면서도 웃는, 그 양가적인 감정들이 충돌하는 지점에 대해 집중했다는 박정민이다.

임영규의 젊은 시절을 연기하며, 자신조차 보지 못했던 표정을 봤을 때의 기억은 박정민에게 강렬하게 남았다. 박정민은 “과거 장면을 촬영하고 모니터링을 했을 때 몇몇 표정이 만화적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평소에 잘 짓지 않는, 어디서 보지 않은 것 같은 얼굴이 나왔을 때 신났다”라고 했다.

이는 배우에게 모든 가능성을 열어주는 연상호 감독의 작업 방식 때문에 가능했다. 스스로 생각한 것들을 자유롭게 펼쳐 보였을 때, 또 그것을 연상호 감독이 마음에 들어 할 때 박정민은 큰 성취감을 느꼈다. 주도적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단다.

적은 제작비로 인한 짧은 촬영 스케줄도 박정민에게 전화위복이 됐다. ‘얼굴’은 13회 차 안에 그것도 2주 만에 촬영을 완료했다. 이는 장편 영화 평균 촬영 기간에 반의 반도 못 미치는, 그야말로 ‘미친’ 일정이다. 이에 대해 박정민은 “13회 차 안에 촬영해야 하다 보니 현장에 나갈 때 조금 더 집중도가 생긴 채로 들어갔다. 웬만하면 두 테이크 안에 끝내야 해서 오히려 집중력이 높아졌다”면서 “원래 연상호 감독님과 작품 할 때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시나리오도 고치고 회의도 하면서 촬영했다”라고 말했다.

‘얼굴’은 박정민의 안식년(?) 종료를 알리는 작품이다. 지난해 박정민은 영화 ‘전, 란’ 인터뷰 당시 당분간 안식년을 갖겠다고 했다. 물론 말로만 안식년이었지, 그는 자신이 운영 중인 출판사 무제 관련 업무를 하느라 막상 쉰 기간은 손에 꼽을 정도다. 오히려 더 바빴다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무제 대표로서의 ‘투잡’은 의외로 박정민에게 연기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일깨웠다. 박정민은 “연기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해본 적이 없어서 모른다. 그런데 제가 연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았다”면서 “촬영장이 되게 좋구나 깨닫게 하는 것 같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어 박정민은 “출판사를 운영한다는 건 짧은 시간이지만 회사 생활을 한 것 아닌가. 그 과정에서 신경 쓸 게 너무 많다는 걸 처음 겪어 봤다. 너무 많은 사람들하고 소통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이 과정이 너무 번잡해서 역지사지의 마음 같은 게 생겼다”라고 괜스레 앓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배우 활동할 때 보다 더 바쁘게 보낸 안식년이지만, 박정민은 후회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연기뿐만 아니라 나아가 영화에 대한 애정을 샘솟게 한 계기였기 때문이다. 박정민은 “제가 관객들과 만나고, 영화를 홍보하며 이야기하고, 또 토론하는 걸 재밌어한다는 걸 어쩔 수 없이 좀 느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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