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영국 시인 월리엄 워즈워스의 ‘무지개’란 시에는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란 구절이 있다. 천상의 기억을 안고 이 세상에 태어난 아이는, 한 해 두 해 한 움큼씩 그 기억을 잃어가며 어른이 된다는 것이다.

2014년 4월 16일, 평생 잊지 말아야 할 사건이 일어났다.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325명과 선원 30명 등 총 476명을 태운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금방 구조될 줄 알았던 이들 중 생존자는 고작 172명, 294명이 시린 죽음을 맞이해야 했으며, 10명은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며 여전히 바다 속에 갇혀 있다.

지난 15일, 잊지 않겠다던 말이 어느덧 일상에 젖어 잊혀갈 무렵, 단원고 생존학생들의 행진이 시작됐다. 목적지는 생떼 같은 아이들을 한순간에 빼앗겨야 했던 부모들이 온 몸으로 절망과 맞서고 있는 곳이었다. 국회 앞, 아이를 가슴에 묻은 부모들은 소리 없이 울부짖고 있었다. 도대체 왜, 우리 아이들이 바다 속에서 목숨을 잃어야 했냐고.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도보행진의 이유를 묻는 어른들에게 아이들은 이렇게 답했다. 투쟁 중인 부모들을 위로하고, 조금이나마 자신들의 힘을 보태고 싶었다며.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00일이 되도록 어른들은 무력했다. 세월호 특별법은 정략다툼 통에 여전히 통과되지 못하고 있으며, 반드시 잡겠다던 유병언은 난데없이 시체가 되어 나타났다. 채 피지 못한 아이들의 넋은 아픈 빚이 되어 차곡차곡 쌓여만 가는데, 침몰한 세월호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할 수 있는 게 많은 어른들은 정작 ‘가만히’ 있었다. 함께 애달파하고 또 분노했지만, 이미 많이 꺾여본 탓일까. 어차피 부조리한 세계고 할 수 있는 건 없다며, 슬픈 무력감에 짓눌린 채 그저 ‘가만히’ 있었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강했다. 더 이상 ‘가만히’ 있기를 거부하고 ‘일어나 걷는 것’을 택했으니까. 피켓을 들고, 아직 무섭지만, 자신과 친구들에게 일어났던 비극과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작지만 거대한 움직임을 내딛었다.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라고 했지만,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한 그들은 보통의 어른들보다 위대했다.

우리가 아이였을 때, 어른을 보며 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 어른이 되면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겠지. 알다시피, 하나의 존재가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과정 속에서 맞닥뜨리는 세계의 모습은 그리 만만치가 않다. 갖가지 현실적 욕망들이 얽히고설킨 어른의 세계는 많은 ‘할 수 있는 것’들을 제한시킨다. 이런 세계의 험상궂은 민낯 앞에서 ‘동심’, ‘꾸밈없이 순수한 마음’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나름 ‘현명하게’ 한 해 한 해 그 마음을 잃어왔다.

하지만 거대한 좌절 앞에 엎드러진 어른들을 움직인 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아이들의 마음이었다. 단원고 아이들은 아마도, 이러한 행진 자체가 소용없을 거란 의심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현실적인 이유들은 다 제쳐두고, 그저 ‘걷는 것’에, 친구들을 위해 걷는다는 것에만 의의를 두지 않았을까. 세월호 침몰 이후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던 어른들과 어른들의 세계가 배워야 할 점이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다.

그렇다고, 모든 어른이 무력하단 얘긴 아니다.

JTBC ‘뉴스9’의 앵커 손석희가 세월호 참사 100일이 되는 오늘, 다시 진도 팽목항으로 향했다. 팽목항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도 거두지도 않겠다고 한 약속을, 그는 여전히 지키고 있었다. 세월호의 비극에 관한 진실이 혹여 가라앉아 사라져버리기라도 할까 봐, 손석희와 ‘뉴스9’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보도해왔다. ‘보도’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으니까.

또한 단원고 학생들이 행진을 할 수 있기까지 많은 어른들의 도움이 있었다. 그들의 계획을 듣고 인솔자가 되어 함께 움직인 교사와 부모에서부터, 행진 중인 아이들에게 격려와 위로의 마음을 건넨 수많은 어른들. 단원고 학생들의 움직임이 완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뒷받침해주었던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워즈워스의 시까지 꺼내들며 이런 긴 글을 읊어댄 까닭은, 아이들의 ‘움직임’이 너무도 소중하단 말을 전하고 싶어서다. 그리고 이 ‘움직임’을 지켜낼 몫은 어른에게 달려 있다. 이 ‘움직임’이 어른의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아이들은 결과를 생각지 않고 행한 것이지만 어른들의 세계가 그리 절망적이지만은 않음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자신들의 작은 걸음 하나가 세계를 바꾸는 특별한 경험을 통해 그들은 아픔을 딛고 보통의 어른보다 좀 더 멋진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 할 수 있는 게 많은 어른들이 더 이상 ‘가만히’ 있지 말아야 할 이유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니스트 news@tvdaily.co.kr / 사진=‘뉴스9’ 화면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