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왕들도 자신이 왕이 될 거라 생각하며 태어나진 않았다. 태어나 보니 왕가의 핏줄을 잇고 있었고 왕이 될 적절한 위치와 상황(왕가의 사람이라고 다 왕이 되는 건 아니니까)에 놓여 있었을 따름이다. 자연스레 이들은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것까지 어깨에 짊어진 채 일생을 살아가야 하는 ‘높은 해’, ‘높은 산’이 된다.

“도대체 내가 무엇이길래 이토록 높은 해가 되었나 높은 산이 되었나”

뮤지컬 ‘1446’은 묻는다. 무엇이 진정한 왕의 길인가. 누가 그 길을 갈 수 있는가. 자신의 형제들까지 죽이며 강력한 왕권을 세운 태종 아래서 자란 세종의 안에서 당연히 생겨날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을 터다. 아버지와는 다른, 죽이는 길이 아닌 살리는 길을 가겠노라 다짐하고 선언한다 해도 맞닥뜨리는 현실은 대립과 반목일 뿐이다.

그럼에도 백성을 위한 조선을 위한 왕의 길, 세종만의 왕의 길을 찾는 여정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조세 제도를 바로잡고 학자들을 모아 집현전을 세워 농사직설을 비롯한 백성의 실제 생활에 필요한 갖가지 지식들을 모아 공유한다. 낮은 신분인 장영실을 기용해 중국 명나라의 시간이 아닌 조선만의 시간을 갖고자 간의(천문대에 설치된 중요한 천문관측기기들 가운데 하나)를 만들기도 한다.

“아비에게 증명하기 위해 신하들에게 돋보이기 위해 백성을 핑계로 한 고집과 오기라는 것을”

간의는 뮤지컬 ‘1446’ 속에서 세종이 아버지와 다른 왕이 되고자 한 노력을 상징하는 실제적 결과물로서 존재한다. 그러니 간의가 완성되었을 때 세종이 느낀 흡족함과 자신이 걸어온 왕의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마음에서 나오는 기쁨은 가히 하늘을 찌를 정도다.

물론 왕의 길을 향한 세종의 여정은 여기서 완성되지 못한다. 마음에 고려를 품고 조선을 흔들려는 이들의 방해가 간의와 이를 만든 장영실을 향한 까닭이다. 결국 어심(御心)에 가득하던 확신은 사라지고, 꿋꿋이 밀어오던 백성을 위한, 조선을 위한 왕의 길이 실은 허울뿐이었단 슬픈 자문에 세종은 좌절한다.

“백성의 마음 길 그 길을 따르소서 백성의 눈물 길 그 길을 닦으소서”
“혀에서 이에서 목에서 입술에서 백성의 몸에서 울려 나오는 기쁨 슬픔 노여움 즐거움”

하지만 우리네 얄궂은 인생사가 그러하듯, 절망의 끝에 그토록 찾던 답이 있기 마련이다. 길을 잃고 주저앉아버린 세종은 천천히 다시 살펴 가면서 백성의 마음 길을 따르라는 소헌왕후의 간곡한 말에 힘을 얻고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만들어진 게 스물여덟 자의 우리말 훈민정음이다.

뜻하지 않게 오른 높은 해, 높은 산의 자리에서 세종이 찾고 견디며 걸어낸 왕의 길은 바람 불면 쓰러지고 비가 오면 그냥 맞고 참고 참는, 이름 없는 들꽃 같은 백성들을 위한 글자를 만드는 일로 완성된다. 그저 높게만 위치하는 게 아니라 백성의 삶을 비추고 길을 내주는 것, 왕의 길을 향한 세종의 치열한 고민이 마침내 다다른 종착지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높은 해, 놓은 산의 자리를 무위도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많다. 그런 예들을 많이 겪어 가질 수밖에 없는 편견이긴 하다만 적든 크든 무엇을 목적으로 하든 어떤 무리의 리더 혹은 수장은 자신이 속한 무리를 위해 존재한다. 때때로 그의 시름이 짙어지고 어깨가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에게 리더 혹은 수장이 지닌 본래의 의미를 되찾아준 뮤지컬 ‘1446’, 곱씹을수록 뜻깊은 작품이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출처=HJ컬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