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조혜진 기자] 말없이 주인공을 좇던 ‘알함브라’ 속 차형석을 연기한 배우 박훈은 “연기 10년 하면 숨 쉴 줄 안다고 하더라”며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역할을 맡은 것에 감사했다. 차형석 덕에 이제 막 숨을 쉬었다는 그에게, 이제 말을 시작할 타이밍이 왔다.

박훈은 tvN 주말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극본 송재정·연출 안길호, 이하 ‘알함브라’)에서 유진우(현빈)와 AR게임 속에서 결투를 벌이다 실제 죽음을 맞이한 후, NPC가 돼 계속해서 유진우를 공격하는 차형석 역을 맡아 활약했다. 3회 만에 사망했지만 NPC로 계속해서 재등장, 대사 없이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대중에 그를 각인시켰다.

지난해 봄 대본 리딩을 시작해 한 해의 마지막까지 긴 시간 촬영했던 만큼, ‘알함브라’는 박훈에게 더 깊은 의미로 남았다. 그는 “이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너무나 좋은 사람들을 만나 기분이 좋다. 그 사람들과 끝을 내야 한다는 건 참 아쉬운 것 같다. 흔히 작품이 끝나면 시원섭섭하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쉬운 마음이 더 크다”는 소회를 밝혔다.


‘알함브라’는 자체 최고 10.0% 시청률을 기록하는 등 크게 화제가 된 작품이다. 이는 박훈에게도 ‘차좀비’라는 애칭을 선물하기도 했다. 이러한 애칭을 얻을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특히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 박훈에겐 정세주(찬열)의 입에서 나온 “나쁜 사람”, 시놉시스에 등장하는 유진우(현빈)의 라이벌, 그의 전처 이수진(이시원)과 결혼하는 사람이라는 세 가지 정보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라이벌이기도 하고 수진이도 얽혀 있어 진우와의 관계가 복잡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저 나쁘기만 한 사람이 아님을 캐치하고, 복잡한 사연을 지닌 인물을 표현하고자 했다. 또한 NPC가 된 후엔 대사 없이 행동과 눈빛으로만 모든 것을 표현해야 했다. 오히려 대사가 없어 더 쉽지 않았을 차형석을 연기하며 박훈은 ‘함축’에 중점을 뒀다. “어떤 마음으로 그 상황을 표현하느냐에 따라 뉘앙스가 다르게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는 “주변 캐릭터 서사가 약해지는 건 작가님께 고통스러운 일일 거다. 하지만 시간의 압박과 분량이 있으니 주인공 외 캐릭터 서사를 줄여야 할 때가 있다. 이 사람이 갖고 있는 사연이 있는데 그걸 시청자분들께 함축해 보여줘야 했다”고 털어놨다. 한 인물이 갖고 있는 서사를, 심지어 대사도 없이 함축해 보여주는 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박훈은 처음 차형석이 등장했을 때 유진우가 그를 대하는 태도, 무슨 관계일까 궁금증을 유발하는 기류를 만드는 작업 등에 신경 썼음을 밝히며 “덕분에 악당이 아닌 애처롭게도 보일 수 있는 입체적 캐릭터로 봐주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3회 만에 죽음을 맞는 데다 표현하기 어렵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알함브라’를 하고 싶었던 이유에 대해 그는 “최다 사망을 기록하고, 테마곡이 있을 정도로 독보적 캐릭터이지 않나”라며 웃어 보였다. ‘W’ ‘나인’을 집필한 송재정 작가, ‘비밀의 숲’을 연출한 안길호 감독에 대한 신뢰도 컸다. 그는 “상상력이 훌륭한 작가님과 전작에서 사실적 질감을 가장 잘 표현한 감독님이 만나지 않았나. 판타지적인 사람과 현실적 사람의 시너지가 궁금했다”고 작품 선택 이유를 밝혔다.


대사가 적은 차형석 캐릭터에 대해서도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역할을 했다”는 그다. 박훈은 “연극을 시작한 지 10년 됐다. 선배들이 연기 10년 하면 숨 쉴 줄 안다고 하더라”며 “이제 말을 시작할 타이밍인 것 같다”고 이유를 덧붙였다. 10년 이상 연극, 뮤지컬 무대에 올랐던 박훈은 TV 작품에 출연한지도 어느덧 4년 차가 됐다. 이제야 숨 좀 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그는 “더 헤매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차곡차곡 필모를 쌓아가고 있는 지금의 속도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앞으로도 박훈은 그저 배우로서 주어진 걸 잘 해내는 데 집중하고자 한다. 박훈은 “일희일비할 때는 아닌 것 같다. 질책에 슬퍼할 필요도, 칭찬에 우쭐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하나하나 잘 밟아 나가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라며 지금의 반응에 휩쓸리지 않고, ‘다음’에 더 집중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알함브라’는 스태프들의 작품”이라는 박훈은 작품을 통해 얻은 깨달음으로 올해 계획을 설정하기도 했다. 자신은 서있기만 했을 뿐, 분장, 음악, CG가 모든 것을 해줬다고 겸손하게 이야기한 그는 “어떤 작품보다 스태프들의 노력이 많이 들어갔다. 개인적 감사함을 넘어 존경스러움을 표하고 싶다”며 “시야가 좁아 제 거 하느라 몰랐는데, 이제야 그게 보이는 것 같다”고 했다.

이어 그는 “그 전에도 스태프 분들의 노력은 계속 있었지 않겠나. 이제야 그게 보인다는 건 저한테도 이제 주위를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 건가 보다. 앞으로는 후배들에게 연기를 더 편하게 할 수 있게 해주는 형이자 선배가 되고 싶고, 선배님들 잘 챙기고, 스태프들 잘 응원해주면서 현장에 좋은 기운 전달할 수 있는 신뢰감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덧붙였다.

박훈은 역할의 크기에 구애받지 않고 제 방향성대로 차근차근 길을 나설 예정이다. 2월 방송 예정인 SBS 드라마 ‘해치’ 왈패 조직의 우두머리 달문 역을 맡은 그는 ‘알함브라’에서 대표 역할을 하다 왈패를 맡은 것이 크게 기뻤다고 했다. “배우는 새로움을 추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며 “내려놓을 수 있을 때 빨리 내려놓자. 무언가가 더 쌓여서 아까워지기 전에 빨리 다시 작은 역할이라도 가자는 마음이다”라고 이유를 밝혔다. 지금에 안주하지 않으면서도, 앞만 보고 질주하기보다 주위를 돌아보겠다는 그다. 작품의 인기에 휩쓸리지 않고 지금처럼 차근차근 걸어갈 박훈의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다.



[티브이데일리 조혜진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송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