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김지현 기자] 데뷔 19년 차 안혜경에겐 절실함이 엿보였다. 한 때 일거수일투족이 대중의 관심사였지만 긴 공백기를 보내야 했던 그의 내면에 남은 건 진정성을 바탕으로 한 절실함인 듯 했다. 그러나 조급해보이기는커녕 편안해 보인다. 오랜 시간 그가 마음에 켜켜이 쌓아 올린 건 무엇일까. “긴 슬럼프를 보냈다”고 말문을 연 그의 시간들이 궁금해졌다.

“기상캐스터 시절에는 모든 게 다 열심이었어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때 가장 열정에 충만했던 것 같아요. 과거엔 기상캐스트가 뉴스를 전달하는 방식이 상당히 소극적이고 단순했죠. 옷차림이나 머리가 단정해야 하고, 움직임도 거의 없었어요. 하지만 전 머리도 기르고 싶었고, 뉴스를 전달할 때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싶었어요. 옷차림도 날씨에 맞게 우비나 코트 같은 걸 입으려 했고요. 당시에는 그게 규정에 어긋나는 일들이어서 툭하면 시말서를 썼어요. 쓰면서도 다음 날 생방송에서 사고를 쳤죠.(웃음)”

안혜경의 시도는 많은 걸 변화시켰다. 기상캐스터의 상징은 여전히 그의 이름으로 통한다. 하지만 정작 안혜경은 일 할 때 늘 불안감에 시달렸다. 기상캐스터는 모두 계약직인 탓에 1년 마다 새로 계약을 맺어야 했는데 그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근원적 불안감을 떨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었다. 안혜경은 그렇게 연기에 도전하게 됐다.

“물론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부분이 있죠. 솔직히 저의 타이틀을 제가 봐도 모르겠어요. 기상캐스터를 관둔지 오래됐으니 그렇게 부를 수도 없고 배우라고도 부르기 모하죠. 방송인이라는 단어도 모하게 느껴지고요. 배우라고 불리길 바라는데 제가 배우로 불릴 자격이 있나 스스로 생각에 빠질 때가 많아요. 저도 제가 처한 현실을 저도 잘 알아요. 그 것 때문에 힘든 시간들을 보냈죠. 하지만 이제는 잘 받아들이고 있어요. 저는 아직도 제가 신인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오디션도 볼 마음을 갖고 있어요.”

안혜경은 인터뷰 내내 자신을 설명할 때 객관적인 태도를 취했다. 의도적 겸손함 속에 도취감을 숨기고 있는 타 배우들과 달랐다. 너털 웃음을 지으며 스스로를 냉정히 평가하는 그의 모습에서 '초심'을 읽을 수 있었다. 이런 태도 때문일까. 되려 모든 걸 할 수 있을 것 같은 신인 특유의 열정 마저 엿보였다. 안혜경은 더 이상 가만히 앉아서 수동적으로 기회가 제 발로 찾아오길 기다리지 않는다.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극단을 통해 연극을 한 건 이 때문이다. 관객들과 소통할 때 느끼는 쾌감은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이다.

“극단 웃어에 소속돼 있는데 최근 지체장애인 역을 맡은 적 있어요. 저 스스로도 그렇고 주변 시선도 ‘할 수 있어?’라고 생각을 해서 용기가 필요했죠. 어떻게든 잘해보자 싶어서 정말 몸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최선을 다했어요. 가장 인상적인 후기가 ‘그 캐릭터를 맡은 배우가 안혜경이라는 걸 끝난 후에 알았다’는 감상평이었어요. 육안으로 절 보면서도 저인 줄 모르고 보셨더라구요. 어떤 배역을 맡았는데 저를 완전히 지울 수 있었던 순간이 있었다는 게 행복했어요. 연극은 그런 보람이 있는 것 같아요. 소규모지만 기회에 감사해요.”

지난 7~8년 간 ‘불타는 청춘’과 특별출연 외 방송 활동이 드물었던 안혜경은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한다. 물론 안혜경 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의도치 않게 공백기에 빠진 연예인들 모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직업적 특수성 때문인지 어려움에도 방구석 자리를 박차고 나가 일반인과 함께 경제 활동을 하는 연예인은 전무하다. 안혜경은 달랐다. 툭툭 자리를 털고 세상 밖으로 행했다. 그의 내공이 심상치 않게 느껴진 건 이 지점이다. 평범한 직장에 취직해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월급도 받았다.

“작품만 기다리면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요. 그러다 보면 우울의 끝을 달리게 되죠. 한 때는 방 안에 한 줄기 빛 마저 들어오는 게 싫어서 햇볕을 다 차단했어요. 어느 순간 반려묘, 견에게 미안해져서 다시 밝은 공간으로 이사를 가긴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람들과의 섞임이 필요했어요. 물론 경제적인 이유도 크지만요. 자산관리하시는 분이 운영하는 사무실에서 계약서 같은 게 있으면 뽑아서 드리고, 복사를 하고, 필요한 정보를 체크해주는 것 같은 아주 단순한 일을 했죠. 단순하고 쉬운 업무가 주어졌는데 가끔 방송 스케줄이 있으면 배려를 해주셨어요. 사실상 아르바이트인 셈이죠. 작은 일이지만 정말 자존감 회복에 도움이 많이 됐어요. 마음이 거의 바닥을 찍었을 정도로 우울할 때 일을 시작해서 그런지 동료들과 섞이는 게 두렵지 않았아요. 다행히 그 분들도 저를 편하게 배려하며 대해줬죠.”

안혜경은 길었던 공백기를 “자의든 타이든 궁극적으로는 제 탓”이라고 말했다. 그저 기다렸다고 한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상당했지만 소속사 사람들을 조르거나 탓하지 않았다. 단순히 ‘내가 모자란 거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을 탓하는 것도 어느 순간 지쳐갔다. 그래서 세상 밖으로 뛰어든 것이다. 이제는 비교적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그 과정에서 만난 ‘불타는 청춘’은 감사한 프로에요. 주변에서 ‘네가 거기 가면 막내인데 괜찮겠냐’고 걱정을 많이 해줬는데 오히려 제작진은 어려진 느낌이 나서 좋다고 해줬어요. 구본승 오빠도 정말 잘해줬구요. 사적인 연락을 하거나 따로 만남을 갖지는 못하지만 오빠가 잘해줘서 편하게 촬영할 수 있었어요. 꼭 오빠가 있는 제주도에 놀러가고 싶어요.”

하지만 안혜경에게 결혼은 먼 꿈과 같은 일이다. 우선순위에는 없는 계획이다. “언젠가는 하겠죠? 근데 한 남자를 평생 지고지순 사랑할 수 있을까 싶어요. 하하. 너무 늦어지면 출산 문제가 고민이겠지만 아직 결혼하고 싶을 만한 사람을 못 만났어요. 제 주변 사람들도 결혼하지 말고 혼자 잘 살라고 얘기하는 분이 더 많아요. 신기하죠? 결혼이나 연애는 알 수 없는 것 같아요. 인연이 생기면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지는 일이잖아요. 자연스럽게 흘러가길 바라요.”

연애와 결혼 보다 일이 더 중요하다는 안혜경은 최근 새 계약을 맺은 소속사에 오디션을 많이 보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무엇이든, 어떤 배역이든 도전하고 싶다고. “얼마 전에도 오디션을 봤고, 좋은 결과가 있으면 좋겠지만 이제는 제가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것 자체에 집중하고 싶어요. 언젠가는 누가 봐도 제 이름 앞 석자에 배우라는 타이틀이 어색하지 않도록 열심히 살겁니다."

[티브이데일리 김지현 기자 news@tvdaily.co.kr /사진=안성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