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김지하 기자] 연예인을 위한다는 ‘이승기법’이 오히려 연예인을 차별하는 ‘악법’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승기법’은 대중문화예술인에게 소속사가 수익 정산 내역을 연 1회 이상 의무적으로 고지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긴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개정안을 일컫는 말이다.

이 개정안은 이승기와 전 소속사 후크엔터테인먼트의 미정산 분쟁에서 시작돼 수면 위로 떠올랐고, 지난달 21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를 통과했다.

불투명한 회계처리로 연예인과 소속사 사이에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한다는 의도이기 때문, K팝을 위한 긍정 효과가 분명하지만 연예계는 이 개정안 통과를 그리 반기지 않는 눈치다.

숨은 조항 탓이다. 이 개정안에는 청소년 연예인의 노동시간 상한선을 기존보다 낮추고, 과도한 외모 관리나 보건·안전상 위험성이 있는 행위 강요, 폭행·폭언 및 성희롱, 학교 결석이나 자퇴 등 학습권 침해 등을 금지한다는 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들의 권익 보호 조항이 포함돼 있는데, 특히 ‘노동시간 상한선’을 두고 반발이 거세다.

개정안은 기존 15세 미만 주 35시간, 15세 이상 주 40시간이었던 노동시간 상한 규정을 12세 미만 주 25시간 및 일 6시간, 12∼15세 주 30시간 및 일 7시간, 15세 이상 주 35시간 및 일 7시간으로 줄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런 기준대로라면 K팝 최전선에서 활동 중인 4세대 아이돌들의 활동 제약이 불가피하다. 그룹 내 청소년 멤버들이 대거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그룹 뉴진스는 막내인 혜인을 포함, 멤버 전원이 15~19세로 청소년이다. 아이브와 르세라핌 역시 미성년 멤버들을 대거 포함하고 있다. 당장 데뷔를 앞둔 YG엔터테인먼트의 신인 걸그룹 베이비몬스터에도 2008, 2009년생 멤버들이 포함돼 있다.

최근 데뷔한 더윈드의 경우 평균 나이가 16.8세라는 점을 들어 최연소 보이그룹이란 타이틀을 앞세웠지만, 이 개정안대로라면 사실상 정상 활동이 불가하다.

데뷔해 활동 중인 아이돌들도 문제지만, 데뷔 나이가 당겨지는 추세에 맞춰 아이돌 론칭 계획을 세웠던 기획사들 역시 초비상 상태다. 이 개정안이 통과돼 시행된다면 활동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하는데, 수정을 한다고 해도 답이 없는 상황이다.

개정안을 두고 업계가 볼멘소리 투성인 이유다. 일부에서는 현장 목소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탁상공론이라는 지적과 함께 K팝의 성장과 발전을 저해하는 것은 나라라는 날선 비판도 내놓고 있다.

한 대형 기획사 고위 관계자 A씨는 티브이데일리에 “개정안대로라면 콘서트 진행 등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라며 “아티스트들이 어려서 보호한다는 이유로 오히려 차별을 하는 것 같다. 그들도 인격이 있고, 생각이 있고,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있는데 이런 것들을 나이로 묶어 다 막고 있다. 현실 반영이 전혀 안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견 기획사 관계자 B씨 역시 “이미 데뷔해서 활동하는 이들은 청소년이자 사회인이다. 그런데 무조건 청소년에 대입해 법 적용을 하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다른 중견 기획사 관계자 C씨는 “대중문화예술에 대한 심각한 수준의 차별”이라면 “연예인들에게 이승기법을 적용할 것이라면 체육이나 미술 등 모든 예체능 분야에도 같은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라고 했다.

C씨는 “밤을 새워 공부를 하는 청소년들의 시간을 제한하지는 않지 않나. 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K팝 아이돌을 꿈꾸는 청소년들에게는 춤과 노래가 같은 의미인데 이 활동에 시간 제한을 둔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라며 “유독 대중예술에만 이런 잣대를 적용해야 하는지 되려 묻고싶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중소 기획사 관계자 D씨는 “‘노동시간’의 기준 자체가 불명확하다”라고 지적하며 “K팝 아이돌들의 경우 합숙이 일반적이다. 또 연습과 활동의 경계가 모호해 출퇴근 자체가 불분명하다. 연습시간이나 해외 스케줄, 심지어 메이크업 받는 시간도 노동시간에 포함시켜야 하는지 따려야 할 필요가 있는데, 모든 시간이 다 노동시간이라면 사실상 연예 활동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이라고 토로했다.

업계 관계자들의 불만 수위가 높아지며 한국연예제작자협회, 한국매니지먼트연합, 한국음반산업협회, 한국음악레이블산업협회, 한국음악콘텐츠협회 등 5개 단체는 지난 16일 성명을 내고 일부 규정 삭제를 요구했다.

단체들은 “연령을 세분화해 청소년 연예인의 용역제공 시간을 제한하는 이번 개정안은 현실을 외면한 ‘대중문화산업 발전 저해 법안’에 불과하다”라며 “산업계는 현행법에 따른 15세 미만 청소년에 대한 노동시간 제한을 준수해왔으며 그 결과 청소년 연예인의 평균 활동 시간은 2020년 기준 현재 개정안에서 제한하는 용역 시간보다도 짧다”라고 짚었다.

이어 “늦은 밤까지 책과 씨름하는 학생들과 다르게 세계적인 대중문화예술인으로 성장하고 싶은 청소년은 원하는 활동을 할 수 없게 돼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청소년 연예인의 활동 제약이 불가피함을 현실적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단체들은 “방송사나 제작사에 상당한 제약이 되어 해당 연령대 출연자를 기피할 수도 있다. 그로 인해 제2의 보아, 제2의 정동원을 더이상 볼 수 없게 될 것이 자명하다”라며 역차별, 불평등을 강조했다. 이들은 해당 조항 삭제와 산업계와 논의를 통한 법안 재검토를 요구한 상태다.



물론, K팝 아티스트들을 위한 법령과 제도를 정비하고 처우를 개선하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기획사의 불공정 계약을 겨냥한 규제가 아티스트들에게 피해로 돌아간다면 이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기획사 입장에서 아티스트는 재산이다. 이에 미성년 연예인의 바람직한 성장 역시 이들이 가장 바라는 바다. 대부분의 기획사들이 수년 전부터 미성년 연예인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이들을 보호해 왔고, 그 결과 ‘청소년 예술인을 위한 지침’ 등이 마련됐다. 청소년 연예인들의 학습권과 수면권 등 기본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 노력했고, 실제로 많이 개선됐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에 이번 개정안은 현장의 이런 노력을 폄훼하는, 기운 빠지는 행정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 현장의, 무엇보다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반영된 실효성 있는 방안에 대한 논의가 시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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