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칠십대의 김혜자 안에는 스물 다섯의 김혜자가 있었다. 알츠하이머를 앓으면서도 끊임없이 복기하고자 했던 시간의 나이, 그럼에도 살 가치가 있는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힘이 구체화된 나이라 할까. 기억을 잃어가는 병이 불러온 역설적인 기적으로 되살아난 그 힘에 왠지 모르게 위로를 받은 건, 상실한 게 아니라 단지 잊고 있었음을 자각했기 때문이겠다.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하여 손담비의 ‘미쳤어’를 부른 지병수 할아버지가 세간의 화제다. 적절히 편곡된 반주에 맞춰 능숙하게 춤을 추며 ‘미쳤어’를 부르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한 두 번 부른 솜씨가 아니더라. 공연 당시에도 많은 이들의 환호를 받은 그의 무대는, 곧 ‘할담비’, ‘지담비'라는 별칭과 함께 SNS를 통로로 삼아 삽시간에 많은 이들에게 퍼져 나가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에 오르기까지 한다.

이 뿐인가. 어느 라디오와 인터뷰도 하고, 손담비가 답례로 같은 곡의 춤을 추는 모습을 자신의 SNS에 올리는 일도 벌어진다. 본인도 약간은 얼떨떨했을 지 모를, 이 갑작스런 유명세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나이 듦에 따라 이런저런 제약이 많아지니 삶의 오후 혹은 저녁이란 암울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막연한 두려움을 안고 있는 젊은 세대에게, 하나의 희망포와 같은 역할을 했다면 과장일까.

자신을 ‘종로의 멋쟁이’라 표현한 것에 걸맞게 센스 있는 옷차림을 한 지병수 할아버지는, 우리로 하여금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는 어느 늙은 재력가를 상상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인지 할아버지의 젊은 마인드는 분명 풍족한 노후에서 나올 거라는 밑도 끝도 없는 확신이 생기더라. 하지만 인터뷰를 통해 접한 할아버지의 사정은 크게 옷장사를 하다 IMF 때 많은 손해를 보았고 현재는 기초 생활보장 수급자로 살고 있다는 것, 18년간 취미로 무용을 배워 왔다는 것 뿐이다.

즉, 암암리에 이루어져 왔던, 유쾌하고 즐거운 삶이란, 늙어서도 가질 수 있는 젊은 마인드란 삶의 풍요에서 비롯된다는 우리의 뻔한 생각의 정곡을 찌른 거다. 물론 삶의 풍요가 마음의 여유를 의미한다면 일치하는 맥락이나, 문제는 마음의 여유 자체가 대부분 물질에서 비롯된다고 여기는 우리의 사고방식에 있고, 아울러 여기서 우리는 깨닫는다. 나이 듦을 두려워했던 건 삶의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로 제약 투성이인 삶의 연약한 순간을 맞이할까 싶어서 라는 사실을.

‘지담비’란 별칭이 붙은 지병수 할아버지의 무대가, 아프지 않고 즐겁게 살다가 어느 순간에 가는 게 행복이라는 할아버지의 말이,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다. 치열하게 살다 실패할 수도 있고, 원하는 꿈을 이루지 못해 절망할 수도 있고, 소중한 존재를 잃어 슬픔에 휩싸일 수도 있다. 설사 그러다 남루하게 늙는다 해도, 삶의 순간 순간을 열정적으로 맞닥뜨린 이의 삶은 어찌 되었든 모든 욕망이 종료되는 죽음 앞에서 가장 사랑스러울 터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 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별 것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대단한 하루를 보내야 한다 강요를 받아왔고 강요를 받는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병수 할아버지의 모습은, 그러지 못했어도 혹은 그러지 않았어도 인생은 충분히 즐거울 만한 가치가 있다는, 쌓인 시간이 건네는 유쾌한 격려이지 싶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