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별다른 대사 없이 몸짓과 표정, 눈빛만으로 8년이나 길거리를 전전하며 세상에 내몰린 소녀의 인생을 표현해 냈다. 설명만 들었을 때는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인, 연기 경험이 풍부한 배우가 했을 법한 역할이다.

하지만 이를 연기한 배우의 연기 경력은 단 영화 세 편이다. 데뷔작인 영화 '들꽃'(감독 박석영)을 통해 주목할 만한 신예 배우의 탄생을 알린 뒤, 영화 '검은 사제들'(감독)의 조연을 거쳐 처음으로 단독 주연을 맡은 영화 '스틸 플라워'(감독 박석영)로 다시 한 번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준비를 마친 배우 정하담이다.

'스틸 플라워'는 친구도, 가족도, 집도 없이 홀로 추운 거리를 떠도는 소녀 하담(정하담)의 긍지를 다룬 작품이다. 소녀는 8년째 길거리를 전전하며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하지만 매번 어른들의 이기심이 그런 소녀의 노력을 짓밟는다. 소녀는 그러한 비정한 현실 속에서도 탭댄스를 추며 희망을 잃지 않는다.


정하담은 이러한 소녀의 이야기가 처음 들은 순간부터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했다. 그래서 박석영 감독이 캐스팅 제의를 했을 때, 망설임 없이 하겠다고 했단다. 소녀 캐릭터와 스토리에 완전히 매료됐던 정하담은 잘 해내고 싶었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숨에 읽어 내린 완성된 시나리오 속 복잡다단한 소녀의 인생과 감정선이 모두 이해가 됐기 때문.

그렇게 자신감 있게 촬영에 들어간 정하담이었지만 그는 촬영 초반 뜻하지 않은 위기를 맞았다. 자신이 연기한 소녀의 모습이 시나리오 속 소녀와 달라 보였단다. 정하담은 이에 대해 "소녀라는 캐릭터를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그때부터 '그럼 어떻게 해야 되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헤매기 시작했어요"라고 말했다.

이후에도 몇 차례 촬영이 진행됐지만 정하담은 계속해서 자신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연기가 소녀 캐릭터를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정하담은 무작정 캐리어를 끌고 길거리로 나가 걷기 시작했다. 영화 속 소녀가 빈집을 찾아 헤매는 하루 반나절의 시간만큼. 또한 길거리에서, 쓰레기 같은 집에서 소녀가 혼자 있을 때 어떤 것을 할 것인지, 계속 그 생각만 하면서 소녀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정하담은 이러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계속 보면서 소녀에 대한 것들을 제 마음 속에 하나하나 쌓아갔다. 결국 어느 순간부터 정하담과 소녀는 하나가 됐고, 그때부터는 자신이 연기한 것과 시나리오 속 소녀의 모습이 같아 보였다는 게 정하담의 설명이다.

치열한 고민 끝에 소녀 캐릭터를 완성한 정하담은 시나리오에 없는 설정까지 추가하며 좀 더 밀도 있게 소녀의 감정선을 그려냈다. 극중 소녀가 일한 돈을 주지 않는 횟집 사장에게 제 나름의 방법으로 응징하는 장면이 그 예다. 소녀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인 사장에게 직접적으로 돈을 달라고 말할 수 없어, 횟집 수조에 있는 물고기를 훔쳐 바닷가에 놓아주면서 자신의 일한 대가를 보상받는 방식을 택한다.

물고기를 놓아준 뒤 소녀는 눈물을 흘리는데, 이는 시나리오에는 없는 설정이었다. 정하담은 소녀가 죄책감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장이 먼저 소녀에게 잘못을 하기는 했지만, 물고기를 훔친 소녀의 행동 역시 정당하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이에 정하담은 소녀의 죄책감을 표현하기 위해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정하담의 노력이 깃든 '스틸 플라워'는 개봉하기 전부터 화제가 됐다. 제14회 피렌체 한국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제15회 마라케시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 제41회 서울독립영화제 대상 등을 수상한 것이 이에 대한 반증이다. 이로 인해 자연스레 정하담을 향해 평단뿐만 아니라 관객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이렇듯 '스틸 플라워'로 정하담은 연기력을 인정받게 됐지만, 사실 촬영하는 내내 부담감에 시달려야 했다. 신인인 정하담이 단독 주연으로서 긴 호흡의 장편 영화를 혼자 이끌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정하담은 이에 대해 "촬영하는 동안 계속 울고, 영화에 대해 생각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아름다운 시나리오를 내가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힘들었어요"라고 했다.

촬영이 끝난 뒤에도 영화가 어떻게 완성될지 불안했다던 정하담은 자신이 영화를 망가뜨린 것은 아닐지 걱정했다. 하지만 완성된 영화를 본 후 정하담은 이러한 부담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제가 그 시나리오를 통해 본 에너지들이 영화에서 다 느껴지고, 정말 좋았어요. 제가 너무 예쁘게 나오는 거예요. 영화를 찍고, 그 후에 했던 고민들이 완성된 영화를 보면서 다 사라지고, 감동으로 바뀌었어요."


'들꽃' '스틸 플라워'를 통해 신인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인상적인 연기력으로 현재 충무로의 기대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정하담이지만, 사실 그는 정식적으로 연기를 배운 적이 없다. 고등학교 때 연극반을 하면서 배우의 꿈을 키웠던 정하담은 연극 영화과에 진학하기 위해 입시를 치렀지만 모두 실패했다.

어쨌든 대학은 나와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연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과에 진학했다. 대학 생활에 적응해나가던 어느 날, 정하담은 "왠지 이렇게 생활하다가는 연기에 대한 생각이 희미해질 것 같았어요"라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정하담은 과감하게 대학을 자퇴하고, 무작정 오디션을 보기 시작했다. "연극 영화과 입시에 왜 실패했나 생각해보니, 제가 너무 떨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입시에 도전하기 위해서, 먼저 담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오디션에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하면서 제 스스로 담을 키웠어요." 여러 번의 오디션을 통해 어느 정도 담을 키운 정하담은 '들꽃'에 출연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그것이 배우 정하담의 시작이었다.

배우로서 이제 막 발을 뗀 정하담은 하고 싶은 작품도, 같이 호흡을 맞추고 싶은 배우도 감독도 많다고 했다.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여러 선배 배우들, 감독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더 많이 배우고 싶다고. 또한 정하담은 연기를 통해 일상생활에서는 쉽게 경험해 볼 수 없는, 영화나 드라마, 연극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소망을 말하기도 했다.

신인이지만, 연기에 대한 열정만큼은 어느 누구보다도 넘쳐나던 정하담은 계속해서 보고 싶은 배우, 다음에는 어떠한 연기를 보여줄까라는 궁금증을 가지게 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음에 좋은 연기를 보여드리려고 노력하겠습니다"라는 각오를 전했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확신에 차 말하는 정하담에게서 그가 정말로 이를 해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는 정하담의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충무로의 기대주라는 수식어가 처음에는 부담스러웠어요. 제가 아직 그럴 정도는 아닌 것 같아서요. 그런데 부담스러워만 하면 제 자신이 불행해지고 불안해지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기뻐해야 할 순간인 것 같아요. 지금이 아니면 들을 수 없는 말이기 때문에 그저 감사해요."


[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news@tvdaily.co.kr/사진=조혜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