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연휘선 기자] 1970년 후반부터 1980년 후반까지 약 10여 년, 한국은 가장 격동적인 현대사를 보냈다. 그 사이 무고한 많은 사람들이 꿈을 꺾였고 휘둘렸으며 유린당했다. 드라마 '모래시계'는 그 굴곡진 현대사를 다룬 최초의 TV 작품이었다. 그리고 원작에 충실한 이야기가 노래와 함께 그 시절 청춘을 위로한다. 뮤지컬 '모래시계'다.

'모래시계'(연출 조광화)는 1995년 방송된 동명의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이다. 원작은 방송 당시 최고 시청률 64.5%를 기록할 정도로 흥행했다. 심지어 방송 시간만 되면 시청자들을 귀가시켜 '귀가시계'라고 불렸을 정도. '모래시계'는 24부작에 걸쳐 사랑받은 방대한 원작을 총 2시간 30분의 공연으로 압축했다. 원작 속 등장인물 태수, 혜린, 우석, 도식, 종도, 재희의 이야기를 각각 뮤지컬 배우 신성록 장은아 박건형 이정열 강홍석 이호원의 목소리로 들어봤다.

공연은 "우리는 반성하는 '사람'은 용서해도, 그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며 친구 태수(신성록)에게 사형을 구형하는 우석(박건형)의 애끓는 대사로 포문을 연다. '모래시계'는 우석의 처절한 선고문을 통해 시작부터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어쩌다 한 인물이 제 친구에 죽음을 선사하는 지경에 이르렀냐고. 이에 태수는 원작의 OST '백학'을 휘파람으로 부르며 그 질문에 정답을 찾아 두 사람의 과거로 관객을 인도한다. 오케스트라도 숨죽인 공연장에 오직 태수의 휘파람 소리만 울려 퍼지고, 관객은 어느새 두 사람이 처음 만난 1970년대 후반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성년의 문턱인 20세에서 세상의 잔인한 편 가르기를 경험한 태수는 다시 한번 '백학'을 휘파람으로 읊는다. 이처럼 '백학'은 태수의 운명이 곤두박질치는 순간마다 때로는 휘파람으로, 때로는 오케스트라의 변주로 울려 퍼지며 종잡을 수 없던 청년의 비극적인 운명을 관객에게 주입시킨다. '백학'과 함께 공연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넘버 '17, 18, 19 그리고 스무 살' 역시 태수와 우석의 상반된 운명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모래시계'의 태수와 우석은 이 넘버 안에서 17세부터 20세까지 넘나 든다. 두 사람은 '17세'엔 밝은 분위기로 희망을 노래하며 허물없이 어울렸으나 '스무 살'에는 각기 다른 운명을 비관적으로 내다본다. 그 사이 두 사람을 깡패와 법대생으로, 죄인과 검사로 극명하게 가르는 이분법이 '모래시계'의 비장미를 극대화한다.



'모래시계'는 1980년대 경제·정치·사회 모든 면에서 역동적이었던 한국의 현대사를 태수와 우석의 운명과 결부시킨다. 두 사람은 재벌 아버지를 두고도 '부르주아 감성'을 경계하며 노동 운동과 독재 타도에 몰입하는 혜린(장은아)과 사랑에 빠지며 노동자들의 냉혹한 현실에 눈뜬다. 또한 우석은 데모에 휩쓸렸다가 사법고시에 낙방하고, 군대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에 투입돼 지독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러나 혜린과 태수, 우석 세 사람은 결국 자신들을 둘러싼 환경 앞에 무력하다. 혜린은 노동자들을 핍박하고 돈밖에 모르는 아버지에게 환멸을 느끼면서도 태수를 무고하지 말아달라며 카지노 사업을 이어받는다. 태수는 그런 혜린을 가지려 더 큰 힘을 얻고자 카지노 사업에 뛰어들고 동시에 정치 깡패로 기생한다. 우석은 다시는 약자를 희생하지 않으려 정의로운 '진짜 검사'가 되려 고군분투하지만 '윗분'들의 지시를 받은 도식(이정열) 세력에게 방해받을 뿐이다. 사랑과 우정, 정의 등 각자의 가치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세 사람이지만 도식을 필두로 한 강자들의 억압에 사랑도 우정도 완전히 이루지 못한 채 휘둘린다.

끝내 태수는 죽음으로 혜린과 우석을 도우려 한다. 혜린에게도 피해가 생길 불법 정치 자금이 기록된 비밀장부를 불태우는 대신, 도식 휘하의 정치 깡패 종도를 죽인 죄를 자백하며 부패한 정치인들의 죄를 고발하려 하는 것. 우석은 도식이라는 더 큰 죄인을 잡기 위해 절친한 태수에게도 사형을 선고하는 엄격한 정의의 칼날을 휘두른다. 결국 우석이 친구에게 죽음을 선사하고 마는 지독한 운명의 밑바닥엔 태식을 '빨치산'의 아들로 소외시키고, 정치 깡패로 유린했던 권력자들의 위선이 있던 셈이다.



'모래시계'는 이처럼 실제 한국의 현대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원작의 이야기를 선택하고 선별적으로 집중하며 태수와 혜린, 우석의 굴곡진 인생을 풀어놓는다. 물론, 원작을 지나치게 축약한 결과 다소 빠른 전개가 감정을 널뛰게 만들기도 한다. 이 가운데 다양한 명곡이 매끄럽지 못한 전개를 채우며 감동을 배가시킨다. 우석이 올곧은 검사로서의 신념을 노래하는 '검사의 기도', 태수가 혜린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고백하는 '너에게 간다', 혜린이 세상을 뒤집어 새 시대를 열겠다는 '모래시계', 모든 청년들이 풍운의 꿈을 안고 세상으로 뛰쳐나가는 '세상 너머로' 등이 대표적인 예다.

무엇보다 배우들은 안정적으로 넘버를 소화하고 짙은 감정 연기로 압축된 서사의 중심을 잡는다. 특히 주연 3인방 신성록 장은아 박건형은 극단적인 전개에도 깊은 몰입감을 유지하고 시종일관 안정적인 호흡과 풍성한 성량으로 전율을 자아낸다. 베테랑 연기자 강홍석과 이정열은 선 굵은 연기로 야심에 찬 정치 깡패 종도와 악행을 일삼는 도식을 소화하며 강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모래시계'로 처음 뮤지컬에 도전한 이호원은 과거 인피니트 멤버 호야로서 보여줬던 퍼포먼스 능력을 십분 발휘, 검도 액션과 넘버를 동시에 소화해 시선을 끈다. 이로써 '모래시계'는 원작을 구현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끝낸다.

'모래시계'는 다음 달 11일까지 서울시 중구 흥인동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티브이데일리 연휘선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신정헌 기자,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