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이기은 기자] 한 대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다독가 부모의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의 언어 성취도는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높았다. 흥미로운 것은 아이가 서재의 책들을 전부 읽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책꽂이에 즐비한 도서 제목을 눈으로 훑는 것만으로도 아이의 언어능력이 증진됐다는 것인데, 이는 인간의 주변 환경 중요성에 관한 선례다.

교육학자들은 동기, 습관, 외부 영향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성격도 수차례 바뀌곤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사람들의 트라우마나 가치관은 가정환경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후 각기 다른 풍파 속에서 모든 이의 인생은 천태만상으로 변모하게 된다. 연예인 자녀들이 부모를 따라 연예인이 되거나 자영업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대수롭지 않게 창업을 도모하는 것처럼 말이다.

올해 뉴욕아시안영화제 최우수 장편 수상작 ‘남매의 여름밤’(감독 윤단비·제작 오누필름)은 주인공들을 둘러싼 동네, 날씨, 타인, 물건, 음식을 향수(鄕愁) 짙게 수놓는 영화다. 여름방학을 맞이한 남매 옥주(최정운), 동주(박승주)는 이혼한 아빠(양흥주)를 따라 치매 할아버지 댁으로 생활 터전을 옮긴다. 먹고 살 요량이 막막한 아빠는 늙은 부친의 양옥집을 동아줄 같은 유산이라 여긴다.

영화에는 몇 가지 변곡점들이 있다. 가령 예민한 사춘기 누나 옥주에게 있어 뽕짝 멜로디로 뒤덮인 할아버지의 낡은 주택은 편안한 공간이 아니다. 그러니 우선은 조악한 핑크 모기장이라도 보호막처럼 두른 채 애써 잠을 청해본다. 아직 엄마 품이 그리운 어린 동주는 그런 레이디 전용 모기장 안에 들어가보고 싶지만 깐깐한 누나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 같은 시작점은 남매의 성장통과 맞물려 후반부의 울림을 낳는다. 성장이란 불시에 도착하는 행운의 편지(이 편지를 읽는 즉시 n명에게 보내지 않으면 불운이 생긴다는 주술) 같은 것이다. 남매에게도 분노나 이별, 욕망 같은 해결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들이닥친다. 게다가 여름과 함께 시작된 상실의 조짐들은 두 아이의 심리상태에 차츰 타격을 입혔다. 하릴없이 가슴 찡한 영화의 변곡점이 여기서 발생한다. 비로소 옥주는 동주를 데리고 모기장 안에서 함께 밤잠을 청하지만 해가 뜬 다음날엔 상실의 기미조차 눈앞에 닥친 현실사건이 된다. 모름지기 삶이란 행운편지의 불길한 순환과도 같은 것이다.



소년소녀의 성장통에 관한 이 같은 기록은 대만의 거장 에드워드 양의 서정적인 카메라워크를 떠올리게 한다. 6시간 러닝타임이 순식간에 흘러가버리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1950~60년대 대만 시대상의 공기, 온도, 풍경을 부드럽게 재현해낸 명작이다. 이와 별개로 당시 대만 정세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대만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무관한 단독 자유를 쟁취하고자 했다.

영화는 14살 소년 샤오쓰(장첸)의 불경한 첫사랑을 담담한 연출로 추적한다. 길거리를 떠도는 소년들은 그들만의 무정부 조직을 형성했으며 그 저변엔 도화지 같은 순백의 소녀 밍(양정이)이 있다. 감독은 샤오쓰가 밍을 기어이 칼로 찔러버리는 살인 순간을 성급한 느와르로 윤색하지 않는다. 그보다 이 같은 세기의 걸작이란 시대적 불안과 공포가 언제나 우리들과 한몸이었다는 자연스러운 결론을 도출해내곤 한다. 예컨대 거리의 시정잡배도 악인도 선인도 범인(凡人)도, 그들 모두가 오늘의 세계를 유기적으로 구성해온 살과 뼈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샤오쓰의 아팠던 첫사랑은 끝이 났지만 사랑의 속성도 마침 그러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생 안에서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찾지 못하거나 변심 어린 가해자가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는 솔직히, 인간이 다른 인간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반대급부의 이야기를 몹시 좋아한다. 사랑의 감정은 언제든 소실될 수 있다. 다만 사람만큼은 윤리, 인내, 사회화를 통해 좀 더 나은 어른이 될 수도 있다고 여긴다. 이를테면 색바랜 사랑의 다른 이름을 동행이라든가 의리라든가 책임이라고, 서로를 부단히 사려(思慮)하는 일이 그렇겠다.



[티브이데일리 이기은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남매의 여름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포스터, 영화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