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히어로로서의 삶은 그렇게 화려하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강력한 힘을 가진 만큼 져야 할 책임은 늘어나니. 다른 이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자신 혹은 자신의 소중한 무언가를 희생해야 할 때도 있으며, 그것을 고통스러워하는 건 어쩌면 사치다. 그저 누구보다 빠르게 그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여 좌절을 딛고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또 다른 희생을 막을 수 있으니까.

건틀렛을 낀 타노스의 손가락 두 개가 튕겨지는 순간 우주의 절반이 날라갔다. 조금만 더 애를 쓰면 막을 수 있었는데 막지 못했다는 절망감, 잃어버렸다는 고통과 잃어버린 자들을 향한 죄책감,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는 히어로로서 무능한 자신에 대한 자책감 혹은 무력감. ‘어벤져스: 엔드게임’(Avengers: Endgame, 2019)은 이러한 가슴을 짓누르는 감정의 무게로 이야기의 서막을 연다.

그 동안 자잘한 패배들이 있다 해도, 실패할지도 모른단 두려움에 휩싸여도 곧잘 승리해 왔다. 하지만 타노스만큼은 달랐다. 설마 했던 실패가, 패배가 찾아왔고 사라지지 않은 사람들은, 살아남은 세계는 사라진 자리가 남긴 슬픔을 오롯이 껴안아야 하는 책임에 고통스러워했다. 무엇보다 가장 고통스러운 자들은 타노스와 직접 맞대결을 펼친 어벤져스, 사랑하는 세계의 참혹한 모습에 그들의 영혼은 비릿한 신음을 흘렸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타노스 이후의 세계에 보이는 히어로들 각각의 반응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가 되기 어려울 만큼 서로 달랐던 성향대로, 어떤 이는 외면한 채로, 또 어떤 이는 나락에 떨어져서, 또 어떤 이는 짓이겨진 마음을 이끌고 애써 자리를 지키며, 주어진 숙명과도 같은 상황을 견뎌 내는데,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도 다른 이들이 알고 보니 하나같이 이미 진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있더라는 것이다.

사라진 자들을 되찾아오는 일, 누군가는 쓸데 없다, 또 다른 절망감만 안겨줄 뿐이다 타박할 수 있으나, 언젠가 나타날 지 모를 회복의 가능성을 위해 누군가는 포기하지 않고 있어야 하니까. 그러다 되돌릴 수 있는 조금의 틈이라도 발견된다면 누군가는 다시 일어나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보아야지 않나. 그럴 만한 힘을 가진 ‘누군가’인 까닭에, 어벤져스는 각자의 좌절을 어떻게든 딛고 일어나 한 데 모여 다시금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싸우려 하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 것은 사람들의 절박함에 떠밀려서가 아니다. 결국 이들 또한 히어로이기 전에 이 세계에 사랑하는 사람을 두었던 혹은 둔 보통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모두의 절박함을 대표한다 하겠다. 그래서 이들의 고뇌는 더욱 깊고 패배가 지닌 좌절감은 더욱 쓰라리다. 누가 히어로로서의 삶을 화려하다 하는가. 복장이나 싸우는 장면은 멋있을지 몰라도 이들만큼 고통스러울 정도로 승리에 집착하고 불안과 두려움에 떨며 사는, 보통의 행복을 그리워하나 그만큼 무거운 책임감에 잠 못 이루는 존재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기어코 다시 일어나 히어로로서의 삶을 완수하는 그들, 사실 마블 시리즈의 진정한 매력은 여기에 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드디어 절대악과 마지막 사투를 벌이는 순간, 유려하고 통쾌한 액션 장면을 그려내기보다 히어로 한 명 한 명의 얼굴에 덮인 그늘과 그것의 서사를 보여주는 데 주력한 이유 아닐까. 덕분에 우리는 비로소, ’어벤져스’를 우리의 영원하고 온전한 히어로로 담아내는, 그야말로 ‘엔드게임’다운 과정을 완료한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출처=영화 포스터]